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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대통령이 준 친필서명 ‘종이마패’ 들고 건설 난관 뚫었다
박태준, 대통령이 준 친필서명 ‘종이마패’ 들고 건설 난관 뚫었다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4.01.14 1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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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건설의 두 주역

 

포항

▲ 첫 출선의 감격을 담은 장면. 사진제공 포스코 커뮤니케이션실

 

포항제철의 건설과정을 보면, 흔히들 쉽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無에서 有를 창조’한 하나의 표본으로 불 수 있다. 그만큼 건설당시의 우리나라 사정이 어려웠고, 외국으로부터의 원조나 지원도 후진국의 입장에서 간단치 않았다는 얘기다. 朴正熙 정부 아래서 포철 건설계획은 여러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친다.


박 대통령의 구상아래 1964년 12월의 ‘철강공업종합육성계획’이 확정되고 부지조성 등의 계획이 추진되지만, 문제는 건설자금. 우리 자체 형편으로는 마련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도움을 청할 곳은 국제사회였고, 그렇게 해서 1966년 12월 설립된 것이 ‘對韓국제제철차관단(Korean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KISA)이다. 미국의 코퍼스社가 중심이 돼 서독의 데마그와 지멘스, 영국의 웰먼, 이탈리아의 임피안티, 그리고 프랑스의 엥시드 등 5개국 8개 제철회사가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키로 한다.

KISA는 한국의 종합제철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자금으로 차관단이 1억 달러, 한국 측이 2천500만 달러를 마련키로 한다. KISA는 종합제철의 규모를 粗鋼생산 연 50만 톤, 그리고 확장 100만 톤으로 잡는다. 그러나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생산규모를 조강 연산 60만 톤으로 시작해 최종적으로 300만 톤까지 확장키로 합의하면서 공장건설 계획이 잡혀진다. 건설은 당시 朴泰俊씨가 사장으로 있던 대한중석이 맡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포항제철 공업단지 기공식이 열린 게 1967년 10월 3일이다.

 
그러나 포철 건설은 부지조성 작업이 진행 중인데도 차관이 확보되지 않아 난항이 조성된다. KISA가 마련한 차관은 4300만 달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대한 지원보다는 자기들의 설비 판매에만 급급하던 KISA 소속 외국회사들의 소극성 때문이다. 다급해진 박정희 정부는 미국 수출입은행이 책정해 놓은 1969년도 對韓차관 일부를 우선적으로 종합제철 사업자금으로 사용키로 하고 요청을 했으나 퇴짜를 맞는다. KISA와 IBRD(세계은행)의 부정적인 견해 때문이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놓은 사람이 박태준 당시 포철 사장이다. 그는 1969년 1월 외자 확보를 위해 미국 방문에 나섰지만 결실을 거두지 못한 채 귀국해야 했다. 낙담 속의 귀국길 하와이 백사장에서 그를 사로잡은 발상은 바로 일본이 한국에 주기로 한 對日청구권 자금이었다. 농림수산부문에 투자하기로 예정된 청구권 자금이 있었는데, 이것을 종합제철 건설자금으로 전용하면 안 될까하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다.


1964년에 박태준은 韓日국교정상화의 막후에서 밀사역할을 하면서 일본의 정계 요인들을 두루 만난 적이 있었다. 일본이 한국에 주기로 한 무상자금 3억 달러 중 그 때까지 적어도 반은 남아있을 것이다. 이 돈을 쓰는 방법을 강구해보자는 발상이었다. 그는 즉시 여장을 꾸려 일본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를 성사해 낸 후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박 대통령도 적극 힘을 보탠다. 이렇게 해서 포항제철의 건설자금이 마련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박 대통령은 포철 건설의 방향 전환을 모색한다. 우리 자체의 案을 바탕으로 자주적으로 추진한다는 게 그 요지다. 박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1969년 6월 경제기획원 내에 ‘종합제철사업계획 연구위원회’를 설치한다. 박 대통령의 이런 의지는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을 외국기관에게 일임하고 결과만을 기다리는 자주성 없는 태도를 지양하고 우리 자체의 案을 만들고 입증자료를 제시해 외국 투자기관을 설득하라”는 당시의 지시사항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와 함께 “이미 추진 중인 항만·도로· 부지 조성공사를 계속해서 강력히 추진하고 종합제철이 국제경쟁력을 갖출 때까지 정부투자를 정부보조로 전환시킬 것”을 지시함으로써 자주적 힘과 시각을 바탕으로 한 포철 건설을 역동적으로 추진한다.


포철 관계자들은 박 대통령의 이런 의지와 노력이 포철의 성공을 예약한 계기로 보고 있다. 만일 KISA의 계획대로 포철이 건설됐더라면 부실기업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이란 견해다. KISA가 한국의 사정과 시각을 도외시하고 계획한 연산 60만 톤 규모의 제철소로는 채산성을 얻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KISA의 계획으로는 공장의 추가확장이 곤란하고 설비는 노후된 것이다. 그리고 초기투자는 적게 들지 모르지만 적정 경제규모로의 확장이 불가능했다. KISA는 한국 철강 산업에 대한 지원이나 경제적 운용성보다는 그들의 설비 수출 등 편협한 이해관계에만 몰두했었다는 지적이다.


1973년 7월 3일 포철의 1기 설비종합준공식이 있던 날,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건설의 첫 물증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낸다. 1970년 4월 1일부터 외자 711억 원(1억7천800 달러), 내자 493억 원, 총 1천204억 원을 들여 건설한 103만 톤짜리 제철공장이 건설된 것이다.
포철 건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단연 박정희와 박태준이다. 혹자는 박정희를 연출자로, 주연배우를 박태준으로 꼽기도 한다.


1969년 12월 포철 공사현장에서 박태준은 황량한 모래벌판에서 사원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박정희는 박태준의 이런 열정과 노력에 날개를 달아준 사람이다. 그는 박태준에게 ‘종이마패’를 준 적이 있다. 박태준이 포철 건설 중 부닥치는 여러 어려운 일에 써 먹으라고 준 친필서명의 메모다. 박정희의 이런 전폭적인 지원이 박태준으로 하여금 포철을 건설 과정에서부터 정치와 행정의 견제나 간여로부터 지켜갈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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