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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찬과 나옹, 그리고 퇴계
나찬과 나옹, 그리고 퇴계
  • 전재강 안동대·국어교육과
  • 승인 2014.02.03 16: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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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면 밥 먹고 고단하면 잠잔다. 이것은 우리가 하는 일상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말은 禪門에서 진리와 일치하는 삶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 됐다. 고려말 나옹 화상도 이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나옹이 본받고 싶어 했던 중국 당대 懶讚이라는 선승이 있었다. 그는 육조 혜능 대사의 제자로 알려진 남양해충국사의 지인이기도 했다. 남양해충은 당시 국사가 돼 승려로서는 출세의 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물러날 때 임금이 다른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해 나찬 스님을 소개하면서 ‘그가 세속으로 나올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현직 국사의 추천이라 임금은 칙사를 파견해 그를 모셔 오게 했다. 그런데 몇 번을 방문해서 요청해도 과연 나오지 않았다. 또 칙사를 파견했다. 그때 마침 나찬은 쇠똥 불에 고구마를 구워 먹고 있었다. 얼굴에는 검정이 묻어 있고 콧물이 나와서 땅에 닿을 정도로 길게 드리워져 사자들이 보기에는 국사 깜냥으로는 참으로 볼 품 없고 민망하기까지 했다. 사자는 그래도 임금이 보내서 온 처지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고 조용히 “스니-임, 콧물이나 좀 닦고 드시죠?”라고 하니 나찬은 그들을 한번 힐끗 쳐다보며 “당신 보기 좋으라고? 해가 가려지니 거기 좀 비켜서기나 하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출세를 좋아하는 듯하다. 세간은 말할 것도 없고 출세간의 종교 집단 안에서도 높은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야단들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출세는 하나로 거의 통일이 돼 가고 있다. 돈을 많이 가지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높은 식견도 지위도, 명예조차도 환전의 크기에 따라 출세 수위가 달라진다. 정치하는 사람, 기업하는 사람, 학문하는 사람, 심지어는 종교하는 사람들까지 예외가 아닌듯하다. 강단에서 교육을 하는 사람들까지 연구비를 많이 받아야 능력 있고 존경 받는 교수가 된다. 제도적으로 그런 기준으로 평가를 받게 돼 있어서 의심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위로부터 평가받는 것은 물론 학생들로부터도 자금 동원 능력이 있어야 존경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내가 왜 이 연구를 하며 이것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이루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본래 목적은 어디로 가버리고 어떻게 하든 많은 돈을 받을 방도를 강구하게 된다. 결국 연구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물신의 가치를 교육 받고 그걸 획득하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평생 세뇌 받으며 자라서 그것을 얻을 여러 가지 능력을 배양하기에 총력을 기울인다. 어른들이 만든 물신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밖으로 밖으로 내몬다. 자라는 세대는 물신을 모실 능력을 기른다고 여념이 없고, 기성세대는 지금 당장 물신을 모셔오기 위해서 쉴 틈이 없다. 너도 나도 같은 것을 추구하다보니 거기에는 경쟁이 치열하게 되고, 경쟁에 이기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다 보니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서슴없이 자타를 향해 극단적 행위를 하기도 한다. 여기에 사회적 갈등이 불거지면서 그렇게 추구하던 물신을 엉뚱한데 허비하는 일이 나타나버렸다. 여러 가지 사회적 갈등으로 허비되는 비용이 연간 300조에 가까워 우리나라 1년 예산에 맞먹는 정도라니 우리가 수단과 목적을 가리지 않고 추구한 물신은 결국 우리를 이렇게 배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말을 바꿔 고려말 나옹화상과 조선시대 대학자 퇴계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옹도 남양해충과 같이 국사의 지위에서 임금을 돕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참여한 승려다. 국사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그 일 자체의 가치에 충실하려고 했다. 임금의 질문에 답하면서 가르치기도 하고 임금을 칭송해 그런 선정이 펼쳐지게 유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연의 임무인 승가 사회를 이끌고 대중을 교화하고,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고 수행함으로써 항상 출처 양자 간의 긴장을 유지했다. 오늘날처럼 밖으로만 가치를 찾는 수행자들에게, 자기처럼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일상에서 게송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에게 그는 쉬지 않고 그 환경과 수준에 맞는 가르침을 촌철살인의 명쾌한 시와 법문으로 교시했다. 만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그 의미와 방법을 가르치고, 출가하는 누이동생의 머리를 깎아주면서 무명의 거친 뿌리를 제거하라는 교시를 내리는 등 나옹은 어디에서든 돌아옴의 미학을 잊지 않았다. 어떤 때는 바쁜 궁정이나 저자 거리에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한적한 산사에 머물기도 하면서 환경마다 걸림이 없이 살아갔다. 그래서 거기에는 대자유와 완성된 인격과 진정한 행복, 휴식이 있었다.


조선 시대 퇴계는 유자로서 나옹과는 이념이 다르지만 닮은 데가 있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는 부모를 생각하고 남의 사정을 살피는 철이 일찍 들었다. 타고난 성격과 본인의 투철한 노력으로 인성과 역량을 고루 갖추면서 성현의 면모를 보이기에 이른다. 명성을 듣고 명종과 선조는 그를 수 없이 부르지만 몇 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출사하지 않고 선비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삶을 살아갔다. 하여 그의 문하에는 장차 조선의 명운을 좌우할 임병양란을 극복하고, 사회적 발전에 기여할 수 많은 제자가 배출된다. 그 역시 자기가 가진 지식과 지위를 밖을 향해 물질을 얻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삶의 목표와 수단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구분하고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기를 똑똑하고 멋있고 대단한 사람으로 자부하면서도 선인들이 투철했던 삶의 본질적 가치에 대해서는 몽매하다. 물신 앞에서는 그 많은 학문과 지식이 무용지물이 돼 버린다. 나찬이 가난 속에서 행복했던 것도, 나옹과 퇴계가 멋있는 삶을 살았던 것도 모두 참된 삶의 가치와 목적에 충실했으며, 나아감에 물러남을 잊지 않고 물러남에 나아감을 경계했던 出處의 미학을 진정으로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던가. 이 세 분 모두 몸의 휴식은 물론 마음을 쉬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는 몸이 피곤하면 쉴 줄 알면서 마음이 피곤하면 쉬 줄을 모른다. 나찬과 나옹은 禪을 통해서, 퇴계를 敬을 통해서 마음을 쉬고 인생과 우주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었기에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고 멋있는 한 바탕의 삶을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 다음호 필자는 이강옥 영남대 교수입니다.


전재강 안동대·국어교육과
필자는 경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남명과 한강의 만남』, 『시조 문학의 이념과 풍류』 등의 저서가 있다. 지금은 한국 선시 쪽으로 연구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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