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19 13:00 (화)
만년설 초원 위의 15세기 ‘대상숙소’ 그리고 비극적 인간사의 자취
만년설 초원 위의 15세기 ‘대상숙소’ 그리고 비극적 인간사의 자취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2.10 15: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_ 4. 키르기즈스탄의 수도 비시켁, 나린과 石城 타시라바트(2)

 

▲ 여름철 송쿨호수 주변 초지. 설산을 배경으로 풀을 뜯는 말들의 모습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는다. 우리도 삶의 환경에 묵묵히 순응해야 하는 것임을. 사진 권오형

월지의 한 부류는 천산을 넘어 또 토루가르트 고개를 돌고 돌아 나린으로, 거기서 또 수없이 많은 산과 계곡을 거쳐 북으로 향해 이식쿨 호수 부근 발리크치에 도달해 바다 같은 호수를 목격했으리라. 그리고 그곳에 영원히 정착하기를 꿈꿨으리라.

“Suffering arises from trying to control what is uncontrollable, or from neglecting what is within our power.”(세상살이 고달픈 건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걸 어쩌려거나 할 수 있는 일을 소홀히 하는 데서 비롯된다.) ―에픽테투스(55-135 A. D.)

몇 해 전 겨울 우크라이나에 다녀왔다. 날씨도 춥고 여행 막바지이기도 해서 주로 수도인 키예프(Kiev)에 머물렀다. 9세기 후반(882년), 멀리 북방의 바랑고이족이 추위를 피해, 식량을 구하고자 긴 남행 끝에 정착한 풍요의 땅. 도시는 드네프르 강이 관통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지적 방황길에 만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러시아 여행길에 이 길을 지나갔다. 붉은 혁명이 불붙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의 『러시아 기행』이 내 손에 들려있었다. 그가 목도한 공산주의 혁명의 거친 모습이 담겨있었다. 사람들은 허상을 쫓으며 산다. 과거나 지금이나. 행복한 사람들은 소수의 지배계층 혹은 특권층에 불과하다. 역사의 기록은 이들을 위한 것이다. 행복한 사람들,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약자, 빈자는 혁명을 생각할 여력조차 없다. 혁명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소외된 권력집단이 기획하는 것이다. 앞세우는 건 민중이다. 때문에 피 흘리며 죽어간 이들 민중을 위한 역사 공간은 없다. 다수 민중의 삶은 행간을 통해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키예프에서의 첫날 밤 나는 바랑고이 오랑캐의 내습에 맞닥뜨린 원주민 슬라브 농민이 된 꿈을 꾸었다.
루스(Rus, 이방인)인 바랑고이는 어느 날 도둑처럼 밀려왔다. 비록 키 크고 사납기는 했지만, 소수인 침입자들인 루스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자신들의 거처 주변을 성곽으로 둘러쌓았다.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도시의 시작이었다. 이를 ‘고로드(gorod)’라 불렀고, 이 말이 세월이 지나며 러시아어 속에 들어가 ‘-grad’로 변모하면서 ‘(성곽)도시’라는 의미를 지니게 됐다.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등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방인 루스들은 성곽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며 새 땅의 새 주인, 지배세력이 됐다. 성 밖의 사람들과는 필요에 따라 교역 등의 관계를 맺었다. 원주민은 피지배계급, 노예집단으로 전락했다. ‘노예’를 가리키는 영어 ‘slave’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확고한 지지기반을 다진 루스들은 키예프에 자신들의 政治體(polity)인 公國(principality)을 세우고, 눈칫밥이나 얻어먹고 예속되기보다는 차라리 독립하고 싶었던 일부 루스 세력은 다른 곳으로 가 또 다른 도시 내지 국가를 건설했다. 백러시아 ‘Belarus(White Rus)’, 모스크바 공국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을 통 털어 ‘루스의 땅’인 ‘Russia’라 부르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자를 빌려 ‘我羅斯’라 표현했다. ‘露西亞’라고도 적는다.

언어에 남은 사라진 시대의 흔적들
오늘날과 같은 국경이 없었던 옛날. 나린과 이식쿨 호수 일대의 초원과 산악, 강과 계곡은 烏孫이라 불리는 나라의 영역이었다. 사마천의 『史記』를 따라가 보자. 한무제의 명으로 13년 동안(기원전 139 혹은 138~126년) 서역을 답사하고 돌아온 張騫의 보고에 의하면, 장건이 흉노에 억류돼 있을 당시 오손의 왕은 이름이 昆莫이었다.


“곤막의 아버지는 흉노 서쪽 변경의 작은 나라의 왕이었다. 그런데 흉노가 그를 공격하여 죽이고 곤막은 태어나자마자 들판에 버려졌다. 그러자 까마귀가 고기를 물고 와 그 위를 날고, 늑대가 와서 어린 곤막에게 젖을 먹였다. 흉노 선우가 그를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길렀다. 장년이 되어 군대를 거느리게 하니 수차례 공을 세웠다. 선우는 그의 아버지의 백성들을 다시 곤막에게 돌려주고 장기간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다. (중략) 선우가 죽자 곤막은 무리를 이끌고 먼 곳으로 옮겨가 독립하여 흉노에 조회하러 가지 않았다.”
장건의 기록을 믿는다면 이 무렵 오손의 서쪽에 大夏가 있었다. 동으로는 당시 무주공산이 된 과거 혼야왕의 땅(옛 월지의 본거지)이 있었다. 오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漢書』 西域傳의 烏孫 관련 기술은 더 구체적이다.


“오손국의 대곤미(大昆彌, 대왕)는 赤谷城에 치소를 두었다. 장안에서 그곳까지의 거리는 8천9백리다. 동쪽의 서역도호의 치소(烏壘城: 쿠차에서 동쪽으로 100km)까지 1천721리, 서쪽 康居의 중심까지 5천리다. 평지는 초원이 넓고 비가 많은 한랭지다. 산에는 소나무와 느릅나무 종류의 수목이 많다. 경작과 파종을 하지 않고 가축과 함께 물과 풀을 찾아 이동을 한다. 생활습관은 흉노와 비슷하다. 오손에는 말이 풍부한데, 부유한 사람은 4~5천 마리를 소유하기도 한다. 오손의 백성은 아주 강악하게 탐욕스럽고, 신의가 없고 강도가 많기로 유명하다. 옛날에는 흉노의 지배에 순응했지만, 그 후 강성해짐에 따라서 복속은 명목일 뿐 흉노의 조회에도 참가하려고 하지 않는다. 국경은 동쪽에 흉노, 서북쪽에 강거, 서쪽으로 대완, 남쪽으로 성곽 여러 도시(오아시스 국가)에 접한다.”


바로 나린(Naryn) 지역이다. 이곳을 흐르는 나린강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대완, 즉 페르가나가 나오고 북쪽 이식쿨 호수의 서쪽 끝을 돌아 추강 상류로 나가면 거기로부터 북서쪽은 강거의 땅이다. 이식쿨 호수의 동쪽 끝을 돌아 북상하면 앞서 월지가 당도한 일리강 유역이 나오는데, 그곳 동쪽, 즉 일리하 상류지역까지가 오손의 강역이었다.


다시 한무제의 명을 받고 오손과의 동맹 협상길에 나선 장건은 이식쿨 호수 남변에서 오손왕 곤막을 접견하고 무제가 보낸 선물을 건넨다. 그리고 오손이 혼야왕의 옛 땅으로 이주한다면 한나라는 공주를 왕비로 보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오손은 분열 상태였고, 곤막도 나이가 들어 한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오손은 지리적으로 흉노와 가깝고 또 오랫동안 흉노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흉노를 두려워했다. 결국 1차 서역밀사 임무였던 대월지와의 동맹제안이 무위로 끝났듯, 오손과의 동맹교섭도 要領을 얻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장건은 오손에서 귀국한 후 大行令 벼슬을 맡아 九卿에 올랐다가 1년 뒤인 기원전 114년 사망했다.


비록 동맹협상은 결렬됐지만, 이후 한과 오손 두 나라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수교사실을 알게 된 흉노는 격노했고, 침공을 시도했다. 그러자 오손은 한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동맹을 맺었다. 동맹의 으뜸은 역시 여자를 매개로 한 혼인동맹이다. 이때 오손은 결혼예물로 통 크게 한의 조정에 말 1천 마리를 바친다. 엄청난 숫자다. 후일 당나라가 티베트의 말 한 마리와 맞바꾼 비단이 몇 필이었는지를 알면 놀라고도 남을 오손왕의 배포다. 漢 조정은 죽은 江都王 劉建의 딸 細君을 오손왕 곤막에게 시집보내며 侍從 수백 명과 엄청난 하사품을 딸려 보냈다(기원전 105년). “오손국 대곤미가 다스리는 적곡성은 장안에서 8천900리 떨어져 있고, 戶는 십이만, 口는 육십삼만, 병사는 18만8천8백 명이다”라고 『한서』 外戚傳은 전한다. 어느새 대국으로 성장해 있는 오손을 보게 된다.


그러자 흉노도 선우의 딸을 곤막에게 시집보내기로 한다. 곤막은 왕의 칭호이며 이 행운남의 이름은 렵교미(獵驕靡). 고령이었던 이 남자는 漢族 여인을 右婦人으로 흉노 출신 여인을 左婦人으로 삼았다. 우부인 세군은 말이 통하지 않고 습속이 딴판인 물설고 낯선 이국에서 향수를 달래며 다음과 같은 시가를 지었다.


“나의 집안은 나를 하늘 저편으로 시집보내니 멀리 이국의 오손왕에게 의탁하네. 궁려(窮廬: 게르(ger)의 借字)로 방을 삼고 전(旃: 모직천)으로 담을 쌓아 肉으로 음식을 삼고 乳汁(마유주인 쿠미스)으로 물을 삼네.
居常土(고향땅)를 생각하면 가슴속에 괴로움 깊어 원하노니 황조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면.” 고구려 유리왕의 왕비 松氏가 죽고 새로 얻은 고구려 출신과 중국 출신의 두 여자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나갔다 돌아오니 힘든 타국생활과 고구려 왕비 화희의 질시를 못 견뎌 한족 왕비 치희가 떠나고 없었다. 뒤를 쫓았으나 허사, 나무 아래 맥없이 앉아 떠나간 치희를 그리며 지은「黃鳥歌」와 대비되는 詩다. 실상은 치희와 세군의 사정과 심사가 똑같았을 것이다.

▲ 隊商들의 숙소였던 타시라바트
미안함인지 배려인지 알 수는 없으나 곤막은 자신의 비로 맞은 세군을 자신이 너무 늙었다며 손자인 잠추(岑)에게 주려한다. 할아버지에 이어 손자에게 대물림된다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기가 막힌 세군은 武帝에게 서한을 보내 하소연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무제의 답신은 냉정했다. “그 나라의 관습을 따르라. 오손과 함께 湖(흉노)를 멸할 날을 기다리고 있으라.” 부득이 세군은 잠추의 아내가 돼 그의 아들을 낳았다. 여자의 운명이라니…. 그리고 44세에 유명을 달리한다. 역사는 이러하다. 개인의 운명은 대개 집단의 대의와 명분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 희생을 강요당하는 쪽에서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을 어쩌려면 더욱 불행해진다. 너무나 가혹한 논리인가?

나린과 타시라바트
현재 나린은 땅은 넓으나 인구는 채 4만이 안 되는 작은 도시로 나린주의 주도다. 주변은 천산계의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시르 다리야의 주요 수원 중 하나인 나린강이 도시 사이를 지나며 그림 같은 골짜기를 만들어낸다.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아주 소박한 소읍에 불과한 나린에는 두 개의 박물관이 있고, 또 작은 규모의 호텔이 몇 곳 있다. 2000년 키르기즈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3개 정부와 아가 칸(His Highness the Aga Khan)에 의해 합작 설립된 UCA(the University of Central Asia) 3개 캠퍼스 중 하나도 이곳에 있다. 하키 클럽도 있다고 하는데, 이 외진 지역에 어울리지 않는 듯싶지만, 유목민 남자들이 오랫동안 ‘콕 보루 (kök börü or kök par, ‘푸른색을 띤 잿빛 늑대’라는 뜻)’라는 말을 타고 편을 나눠 산 늑대(요즘은 염소나 양)를 낚아채는 경기를 즐겼음을 감안하면 이해가 된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산악의 유목민들(특히 힌두쿠시 산중의 카피르들(the Kafirs, 아랍어로 ‘이교도’ 혹은 ‘이방인들’. Nuristani라고도 불림.)) 사이에 여전히 이 경기가 유행하고 있는데, 그 곳에서는 부즈까시(buzkashi or bozkeshi)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실베스타 스텔론 주연의 근육질 마쵸 영화 「람보 3」에 이 경기가 등장한다. 한편 미국판 부즈까시가 있다. 이름은 카프카즈(Kav Kaz). 1940년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의 젊은이들이 5인 1조의 팀을 이뤄 양가죽으로 만든 공을 가지고 마상경기를 시작한데서 비롯된다. 이 격한 매력의 유목민 스포츠를 수입한 곳이 비단 미국만은 아니다. 폴로 또한 부즈까시의 영국식 변형이다. 손으로 하는 것은 위험하니 긴 막대기를 사용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나린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유력하다. 하나는 언어적 분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나린’이 ‘양지 바른, 햇살 가득한(sunny)’이라는 뜻을 갖는 몽골어에서 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구전에 바탕을 둔다. 옛날 어느 목동이 안디잔(Andijan, 현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지역)에 가축을 팔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피곤한 나머지 야일루(jailoo, 여름목초지)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말도 풀어놓았다. 고삐가 풀리고 자유롭게 된 그 말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아르파(Arpa, ‘보리(barley)’)라 불리는 곳에서 풀을 뜯어먹고 배를 채웠다. 아마 보리밭을 헤집고 신나게 먹었을 것이다. 다음날 눈을 뜬 목동이 말을 붙잡으려 하니 이놈이 요리조리 달아났다.

목동이 급히 쫓아가 말을 잡은 뒤 괘씸한 생각에 죽여 그 자리에서 말고기를 요리해 먹었다. 하지만 말의 머리는 그 자리에 남겨두고 그곳을 ‘앗바시(At-Bashi, ‘말머리(horse’s head)’)라고 이름 붙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말고기를 먹다가 마지막 남은 고기를 잘게 썰어 넣고 국을 끓여 먹었는데 이 요리 이름이 나린(Naryn)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장소인 이곳이 나린이라 불리게 됐다. 마치 ‘전설 따라 삼천리’라는 추억의 프로그램을 듣는 느낌이다.


여기 나린시에서 고대 실크로드의 한 갈래였던 길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면 키르기즈스탄 특유의 인적 없는 고원이 연달아 펼쳐지고, 마침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주 카시가르로 통하는 해발 3천752m의 토루가르트 고개(Torugart Pass)에 당도하게 된다. 그 중간에 길을 바꾸면 타시 라바트(Tash Rabat)가 나온다. 월지의 한 부류는 이 길을 거슬러 나린 초원으로, 또 강과 산줄기를 따라 이동해 이식쿨 호수에까지 오게 된 것이리라. 다시 말해 천산을 넘어 또 토루가르트 고개를 돌고 돌아 나린으로, 거기서 또 수없이 많은 산과 계곡을 거쳐 북으로 향해 이식쿨 호수 부근 발리크치(Balykchy)에 도달해 바다 같은 호수를 목격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곳에 영원히 정착하기를 꿈꿨으리라. 그러나 뜻대로 되는 일은 없다.


나린주는 1939년 천산주라는 이름으로 설치됐다가 1962년 해체, 8년 후 다시 재설치됐다. 그러다 1988년 이식쿨주와 병합됐는데, 결국에는 1990년 나린이라는 현재의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일대의 명소는 뭐니뭐니해도 송콜 호수(Song-Köl, 정확히는 ‘송 호수(köl)’, 문자적 의미는 ‘버금 호수(following lake)’. 으뜸 호수는 이식쿨))와 차티르 콜 호수(Chatyr-köl, ‘天上 호수(celestial lake)’), 그리고 많은 이들이 고대 실크로드 대상숙소로 짐작하는 타시 라바트(Tash Rabat)다. 내가 나린을 찾은 것은 바로 송콜과 타시 라바트를 보기 위해서였다.

고대 중앙아시아 초원과 하이브리드 사회
나린이 키르기즈스탄의 영역이라고 키르기즈인만 산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25만 여 주민의 99%는 키르기즈인이고, 아주 소수지만 우즈벡, 둥간, 카자흐, 러시아인들도 살고 있다. 월지인들, 그리고 그 많던 오손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예전에는 국경이 없었다. 임의로, 계절 따라, 환경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았다. 유목민의 삶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여러 종족들이 이웃해 살았다. 때로 싸우고 그보다는 자주 우호적 관계 속에 공생했다. 오늘날의 다문화, 다인종 사회와는 다른 차원에서 고대 중앙아시아 초원은 하이브리드 사회(hybrid society)였던 것이다.


타시 라바트는 돌로 지어진 15세기 대상숙소(caravanserai)라고 한다. 나린주 앗바시구에 위치한다. 나린이라는 지명의 유래 이야기 중에 등장하는 장소 ‘말머리(馬頭)’가 바로 앗바시다. 구전 속 목동이 긴 여행길에 하룻밤 쉬어간 곳은 다른 여행자나 대상들이 쉬기에도 적합한 곳이다. 여기에 의당 대상숙소가 지어질 법하다. 혹자는 현재의 타시 라바트가 대상숙소가 아니라 10세기경의 네스토리아교나 불교 수도원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름만으로 보자면 돌(tash)로 지은 要塞 (rabat, fortified place), 즉 石城이다.


타시 라바트 남쪽에 차티르 쿨과 토루가르트 고개가 있다. 북쪽으로는 코쇼이 코르곤(Koshoy Korgon: korgon은 kurgan이라고도 하는데 투르크어로 무덤, 봉분(tumulus)을 가리킴)이라는 이름의 연대미상의 폐허가 된 요새가 있다. 누가 초원과 산뿐인 이곳에 성채를 지었을까. 성채 구축의 목적이 방어에 있음을 감안한다면 여기도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와의 갈등이 상존했던 지역이었음을 추측케 된다. 이래서 인간사는 항시 비극이다.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