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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건설 희생자는 모두 몇명?
경부고속도로 건설 희생자는 모두 몇명?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4.02.10 16: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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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는 전투였다” … 난공사 ‘당제터널’, 軍공병대 투입하기도
“경부고속도로는 정상적인 공사가 아니었다. 전투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의 현대건설 시절을 회상하며 쓴 『신화는 없다』는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그만큼 비정상적으로 건설된 고속도로라는 것이다. 후진국의 여러 어려운 처지에서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고속도로를 건설하려 했고 이를 이뤄냈으니, 무리수를 둬가며 강행해 달성했다는 성취감과 함께 졸속 및 부실공사의 자조가 묻어나는 얘기다. 428km를 2년5개월만의 기간에 km당 1억원 정도의 건설비로 건설된 게 경부고속도로다. 40여 년 전이지만 가히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유례가 없는 대역사였다. 하지만 그 걸 토대로 한국의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속도로 건설 기술과 건설 중장비 등 무엇 하나 변변한 것 없이 ‘조국 근대화’라는 슬로건 아래 용감하지만 무턱대고 덤벼든 당시 이런 비정상적인 대역사의 이면에는 웃기고 울리는 얘기도 많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있어 가장 난공사 구역은 대전 가양동과 비래동을 가로지르는 ‘대전육교’와 금강휴게소 인근의 ‘당제터널’이었다. 대전육교의 경우 공사 과정에서 3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문제는 이 육교를 당시 국내에는 기술도 없던 아치형대교로 건설했기 때문이다. 이 아치형대교를 정주영 당시 현대건설사장이 밀어 붙였는데, 기술력 부족으로 붕괴사고가 숱하게 일어난 것이다.


‘대전육교’보다 더 했던 곳이 ‘당제터널(옥천터널)’이다. 이 지역의 지반은 경석이 아닌 절암토사로 된 퇴적층이라 발파작업을 할 때마다 토사가 산사태처럼 쏟아졌고 그 때마다 숱한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별 얘기가 나왔다. 터널 앞에 버티고 선 거대한 느티나무도 그 중 하나다. 느티나무를 베야 하는데 ‘신령’이 무서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결국 군인이 나선다. 고속도로 매 공사현장에는 군 공병대가 대거 투입되고 있었다. 어떤 중령 한 사람이 휘하 병력에 명령을 내리고 인부들을 다그쳐 느티나무를 벴다. 나무는 쓰러졌다. 그러나 중령은 다음날 교통사고로 후송을 당한다. 이에 많은 인부들이 일손을 팽개치고 현장을 떠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 터널구간 공사에서만 낙반사고가 13번 나고 10명이 죽었다고 공식적으로 기록돼 있다.

 


1970년 7월 7일로 고속도로 개통식 날이 잡혀져 있었다. 야전침대로 현장에서 지내던 정주영 사장의 눈에 불이 켜졌다. 결국 일반 시멘트 대신 수십 배 값이 비싼 조강시멘트와 밤샘작업으로 工期를 맞출 수 있었다.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이 두간 모두 현재는 경부고속도로에서 사라지고 폐쇄된 상태다.


2년5개월의 경부고속도로 강행군 공사 끝에 77명의 근로자가 희생됐다. 이것은 공식적인 기록이고, 금강휴게소 인근에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죽어간 77명을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77명 이 숫자가 진실일까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77명이 훨씬 넘게 죽었다는 증언도 꽤 있다. 공사 한 구간이 약 10km이고 여기에 하루 1천명 넘게 인부가 투입됐다. 제대로 된 장비가 없으니 크고 작은 모든 공사를 다 사람의 손으로 했으니 다치고 죽는 사람이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 위령탑이 세워진 옥천. 그림에서 보이는 다리 건너 당제터널이 있다. 토사가 많은 이들을 앗아갔다.


희생자가 77명이라는 것에 토를 다는 사람도 있다. 왜 하필 77인가. 준공식 일자인 7월 7일에 맞춘 것이라는 뜬금없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희생자 수로 집계된 77명은 공무 중 사망했거나, 그 신분이 비교적 명확한 사람들에 한한 것이었던 것인 만큼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알 길이 없다. 정부당국에서는 이 77명에 대한 보상과 위령탑 건립만 공식화 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작업 전선에서 쓰러진 역군들입니다. 건설회사에서 보상을 했습니다만 우린 우리대로 유가족 보호에 노력하고 있어요. 고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곡천 큰 다리에 위령탑을 아담하게 세웠어요.” (1970년 7월 2일 이한림 당시 건설부장관의 신문 인터뷰).
그들의 희생 위에 오늘 한반도 반쪽 남북의 동맥격인 경부고속도로가 달리고 있다. 40여 년이 지났지만 건설공사에 땀방울과 목숨을 바친 이들의 희생을 오늘날 다시 한번 되새겨 봐야 한다. 아울러 “하면 된다”고 다그치던 박정희의 리더십도 인정해줘야 한다. 그 모두 그 시절에나 가능했던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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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wda 2018-01-19 20:48:14
근대적 관점에서는 이해할수는 있어도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때는 인명경시 결과중시의 최악의 공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