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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살아가는 전통 韓紙, 1백년을 이어온 4代의 家業과 만나다
천년을 살아가는 전통 韓紙, 1백년을 이어온 4代의 家業과 만나다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4.02.18 1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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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_ 21. 韓紙匠 장용훈(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紙千年 絹五百. ‘韓紙는 천년이오, 비단은 오백년’이라는 말이 아무렇게나 나온 게 아니다. 100년도 안 돼 망가지는 西洋紙에 비해 우리 韓紙는 수백 년 세월에도 변함없는 빛깔과 광택, 그리고 강건함을 자랑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전통 韓紙는 명성이 높고 우수하다. 이 일을 장용훈 韓紙匠은 100여 년, 4代 째 이어오고 있다.

종이는 흔하다. 용도와 모양에 따라 주변에 널린 게 종이다. 종이가 무엇인지도 잘 안다. 그렇지만 정작 종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라면 좀 머뭇거려진다. 숨 쉬는 공기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만 설명할 수 없듯이. 종이의 사전적 풀이는 “식물성 섬유를 원료로 해 만든 얇은 물건으로 주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인쇄를 하는 데 쓴다”고 돼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종이의 개념은 천연식물이 원료라는 物性에 있는 것이다. 고대 파피루스나 양피지, 대나무나 나무를 얇게 깎아서 만든 것과 같은 것들은 모양과 용도가 같아도 종이라고 할 수 없다. 종이는 순수한 식물재료를 원료로 합성해 만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종이의 역사는 서기 105년 중국 후한시대의 채륜이 넝마를 찧어 만든 종이인 ‘채후지’를 최초의 것으로 보고 있다. 종이 제조법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시기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대략 2세기경에서 6세기 사이로 잡고 있는데, 7세기 초인 삼국시대에는 제지기술이 한반도에 보편화된 것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韓紙는 고려시대부터 그 명성이 높았다. 중국인들이 당시 제일 손꼽은 종이를 高麗紙로 불렀을 정도였다. 韓紙의 우수성은 세계 最古의 『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에서도 입증된다.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1천300여년의 잠에서 깨어나 문득 우리 앞에서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韓紙의 힘이고. 600여년 만에 프랑스와의 공동신청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에서도 韓紙의 뛰어난 우수성이 입증된다.

지난 2011년 프랑스에서 반환된 『외규장각의궤』는 우리 전통 韓紙가 얼마나 강하고 우수한지를 만천하에 증명했다. 100년만 지나도 망가지는 서양 종이와 달리, 의궤 속 韓紙는 수백 년 세월에도 변함없는 빛깔과 광택을 자랑하고 있었다. ‘紙千年 絹五白.’ 韓紙는 천 년이오, 비단은 오백 년이라는 옛 말이 아무렇게나 나온 게 아니다. 그만큼 우리 전통 韓紙는 명성이 높았고 우수했다.

한지장이 전남 장성에서 경기도 가평으로 간 이유
그러나 근현대를 지나오면 건축양식과 주거환경의 변화, 서양지의 수입으로 전통적인 韓紙의 명맥 유지가 어려워졌다. 韓紙 제작은 생산원가와 제작공정의 편의로 원료인 닥나무 껍질 대신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수입한 펄프를 사용하기도 하고, 합성과정에서 화학약품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전통 韓紙의 위기 속에서 4대, 100여년간을 우리 韓紙 만들기에 매진해오고 있는 집안이 있다. 전남 장성, 韓紙 뜨는 집안의 장용훈(81) 선생은 조부와 아버지를 거쳐 이 일을 60년째 하고 있으며, 선생의 아들이 4대째를 이어가고 있다.


▲ 음양지 소책
장성과 전북 전주, 임실 등지에서 조부 장경순, 부친 장세건에 이어 3대에 걸쳐 韓紙를 만들던 선생의 일가가 현재의 경기도 가평군 청평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은 것은 지난 1977년. 가평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韓紙의 원재료인 이곳의 닥나무가 전국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옛날 高麗紙를 만들어 멀리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전주 지역의 紙匠들도 이곳 가평 닥으로 韓紙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선생이 韓紙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열일곱 살 무렵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는 일을 보며 자연스럽게 종이 만드는 일에 호기심을 갖게 됐고 그게 생활화되면서 평생의 업으로 삼은 것이다. 나무가 종이가 된다는 게 어린 마음에 참 신기했던 것이다. 선생의 부친은 그러나 아들이 종이 만드는 일을 하지 않길 바랐다. 평생 고생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좋아서 시작한 종이 만드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 일이 좋았던 것이니 타고난 운명이었다고나 할까. 여러 차례 만류하던 부친도 아들의 솜씨를 지켜본 후 결국 아들의 길을 걷게 한다. 아버지는 “네게 남길 것은 종이밖에 없다. 너도 종이를 반드시 지켜라”는 유언을 남겼고, 선생은 아버지의 이 유언을 평생 마음에 담아 종이 만드는 일을 해온 것이다.


韓紙 인생 60여 년 동안 선생은 陰地와 陽地를 오갔다. 한국전쟁 이후 공문서 복원 사업으로 韓紙 수요가 급증하면서 일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호황을 누렸지만, 1970년대 들어 西洋紙가 보급되면서 韓紙의 수요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고 韓紙 만드는 일도 침체되는 상황에 직면한다. 韓紙 일을 하는 많은 장인들이 당시 이 일을 그만두고 떠난다. 그러나 선생은 이 일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고난의 세월이 계속 이어졌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었던 선생은 1977년 경기도 가평으로 옮겨와서도 전통 방식만을 고집한 韓紙 만들기를 이어간다. 종이 한 장에 다른 사람보다 몇 배 시간이 더 걸렸고, 제조원가는 높은 이중고는 계속된다. 가격이 비싸니 종이를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다 그 후 자연재해까지 작업장을 덮쳐 모든 것을 잃게 될 상황에까지 내 몰린다. 수입이 끊긴 그 당시 선생의 가족은 하루 세끼 먹기도 어려울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래도 선생은 우직하게 그 옛날 아버지가 가르쳐준 방식대로 계속 닥나무를 매만지고 닥겁피를 제거하며 韓紙를 떴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 韓紙의 우수성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선생의 노력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1980년대 말부터 예술가들이 선도적으로 韓紙를 찾기 시작했다. 서예가와 화가들은 그 이전까지 수입펄프로 만들거나 화학염료를 섞어 만든 종이로 작품을 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이 망가져가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소실되는 문서들을 보존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도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닥나무로 만든 韓紙의 보존성이 다시 조명을 받게 된다. 원래 재래 韓紙엔 닥나무와 풀 역할을 하는 黃蜀葵나 느릅나무 같은 식물 외에 인공적인 것은 아무 것도 섞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화되는 와중에 편리한 화학재료가 쏟아져 들어왔고, 많은 韓紙가 이 새로운 재료들과 타협을 했다. 그래서 전통방식으로 떠낸 선생의 韓紙는 그 자체로 귀한 물건이 된 것이다. 바닥까지 치달았던 韓紙의 수요가 다시 오름세를 타기 시작했다.


아들인 장성우가 아버지 일을 도우기 시작한 게 이 무렵이다. 국내외 서예가와 화가들이 선생의 작품을 찾기 시작했고 작품전시도 개최한다. 1998년에는 일본의 종이예술가이자 제지사업가인 사카모토 나오아키(板本直昭)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일본에서 살아진 陰陽紙에 대한 수소문 끝에 선생을 찾았고, 지금은 살아진 일본 ‘센카지 원류의 음양지’를 선생의 음양지에서 찾았다. 이후 그는 선생의 종이에 반한 나머지 단골 고객이 됐고 2005년에는 선생의 음양지로 서울에서 작품전을 열기도 했다.

선생은 韓紙 중에서도 특히 음양지와 보수지의 대가로 손꼽힌다. 문창호지인 음양지는 얇은 韓紙를 아래 위를 엇갈리게 덧대어 겹쳐 만드는 두꺼운 종이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바로 이 종이에 인쇄됐다. 선생의 음양지 기술은 아버지로부터 특별히 전수받은 것이다. 아버지는 그에게 “이 종이를 끝까지 지키고 남겨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오래된 서예나 미술작품의 손상부위를 복원하는 데 쓰이는 극도로 얇은 종이인 보수지는 그만큼 만드는데 까다롭고 뛰어난 기술이 필요하다. 음양지와 보수지 외에도 선생이 보유하고 있는 여타 韓紙 기술은 당대 최고로 꼽힌다. 이끼로 만드는 苔紙, 닥나무에 소나무 껍질을 섞어 만드는 松皮紙, 버드나무 잎을 섞어 만든 柳葉紙, 섬유를 거칠게 갈아 넣은 문용지 등이 그 것이다. 이들을 포함해 韓紙의 종류는 240가지가 넘는데 현재 선생의 공방에서는 200가지 정도를 만들고 있다.


▲ 자연빛깔 음양지
이들 韓紙를 만드는 공정과 과정에 정성과 땀이 배어난다. 韓紙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다. 닥나무는 추수가 끝나고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의 1년생을 거둬 쓴다. 그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1)6~7시간 동안 푹 찐 닥나무 껍질(피닥)을 벗겨 물에 담가 불린다. 겉껍질을 제거한 속껍질을 ‘백닥’이라 한다. 2)백닥을 콩대, 메밀대, 목화대, 고추대 등을 태워 만든 잿물에 넣고 장작불에 삶아낸 뒤 맑은 물에 헹궈낸다. 이 때 잿물은 표백제의 역할도 한다. 3)백닥에 섞여있는 불순물을 손으로 하나하나 골라낸다. 4)티를 골라낸 뒤 닥을 죽이 되도록 두드려 잘게 분쇄한다. 5)지통에 분쇄한 닥과 깨끗한 물을 넣고 세게 저어 풀어준다. 이 때 황촉규를 넣는다. 6)발틀에 발을 얹은 뒤 앞으로 옆으로 물을 흘리며 한지를 뜬다. 7)발로 떠서 건져낸 종이를 멍석 위에 차례로 쌓아올린 뒤 건조시킨다. 8)말린 한지를 겹겹이 쌓아놓고 두드려 밀도를 높이게 위해 방망이질(도침)을 한다.


한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닥나무를 비롯해 잿물, 물, 황촉규의 네 가지 재료가 갖춰져야 한다. 황촉규는 韓紙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의 섬유들을 잘 엉키게 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보통 닥풀이라고도 한다. 제작과정에서 가장 어렵고 까다로운 작업은 잿물을 만들고 닥나무를 삶는 일이다. 보통 원료인 닥나무를 준비하는 기간이 2~3주 걸리고, 그것으로 2~3일에 걸쳐 종이를 만든다. 이 모든 과정을 오로지 ‘손’만으로 한다.

4代 장성우 전수자, 전통 기반 새 韓紙개발 주력도
선생은 1996년 12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6호 紙匠 보유자로 이름을 올렸고, 그 이듬해 제22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했다. 2010년 3월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韓紙匠 보유자로 지정됐다.
장용훈 선생의 60여년에 걸친 韓紙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같은 해, 같은 날 동시에 무형문화재 제117호 韓紙匠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洪춘수(76) 선생이다. 두 명인은 아버지 대로부터 백년 가까운 세월동안 한지 만드는 같은 일로 이어져온 인연을 갖고 있다.

장용훈의 아버지 장세권이 1920~30년대 오일장마다 종이를 팔러 다녔는데, 장성 인근 순창 장터에서 역시 종이를 팔러 나온 홍춘수의 아버지(홍순성)을 만나 알게 된 것이 시초였다. 두 사람은 이후 ‘형님 동생’하며 지냈고, 그 후 6·25로 한동안 연이 끊겼다가 전쟁 후 전주에서 약속한 것처럼 두 집안이 다시 만나서 지금까지 ‘韓紙名家’들끼리의 연을 이어오고 있다. 두 匠人은 이런 인연을 기려 지난 2010년 11월 서울에서 ‘천년 한지, 백년 인연’이란 제목의 공동작품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홍춘수도 현재 전북 임실에서 ‘청웅 한지’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현역’이다.
선생은 현재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다. 2000년 대 초 원인모를 두통으로 일 년 정도를 앓았는데, 그 후 청력을 거의 잃었고 기억도 많이 잃은 상태다. 거기다 연로한 나이로 현재는 요양원을 오가고 있다. 몸 상태도 그렇고 기억도 많이 잃었지만 그래도 잊지 않는 것은 종이 뜨는 일이다. 선생의 경기도 가평 공방이름은 ‘張紙房’이다. ‘장 씨 가족이 종이 만드는 공방’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그의 아들 성우(47) 씨가 선생의 전수자이자 공방의 실장으로서 전통 韓紙 계승 일을 하고 있고 그 외 가족들도 일에 힘을 보태고 있다.


성우 씨가 韓紙 일을 한 경력도 20년을 넘겼다. 1991년 스물다섯 되던 해 군에서 제대한 후 복학하지 않고 아버지 일을 거들면서 한지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다. 물론 그 과정에 갈등도 많았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든든한 후계자로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韓紙의 미래가 전통방식을 토대로 한 새로운 제품의 개발에 있다고 생각한다. 전통은 기본이고 그걸 지키면서 소비자가 원하는 새로운 요구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韓紙에 창살 무늬나 대나무 무늬를 새긴 ‘문양지’, 닥나무 섬유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게 한 ‘미상지’, 표면이 우툴두툴한 ‘요철지’, 전통 한지에 옻칠을 해 색을 입힌 ‘옻칠지’ 등 다양한 한지를 수년에 걸쳐 개발해 내놓아 호평을 받고 있다. 선생도 아들 성우 씨의 이러한 새로운 韓紙 개발 의지를 적극 뒷받침하고 있다. 성우 씨는 이런 韓紙 개발에 적극적이지만, 두 가지 원칙은 꼭 지킨다고 한다. 닥나무 외 다른 원료를 쓰지 않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닥나무가 가진 物性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선생은 요즘 아버지로부터 받은 말을 아들 성우 씨에게 자주 한다. “너에게 남길 것은 종이밖에 없다. 너도 종이를 반드시 지켜라.” 아들은 화답한다. “아버지를 이어 오래가는 종이를 계속 만들 겁니다.” 대를 이어 갈 ‘韓紙名家’의 또 다른 100년에 대한 기대가 이 말 속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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