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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고, 쉬고 또 쉬고
쉬고, 쉬고 또 쉬고
  • 정효구 충북대·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4.02.18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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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릴레이 에세이

‘쉬고, 쉬고 또 쉬고’는 경상북도 봉화군의 축서사 선원장으로 계시는 無如 스님의 禪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 제목이다. 선의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쉼’에 있다는 것을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마음이 경계를 좇아 내달리거나 욕망에 지배돼 헐떡일 때, 이 제목을 만트라처럼 읊조린다. ‘쉬고, 쉬고 또 쉬고’, ‘쉬고, 쉬고 또 쉬고’라고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경계가 空해지고 욕망 또한 고요하게 잦아든다. 그야말로 이 언덕의 마음에서 저 언덕의 마음으로 이주를 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땐들 인간세상이 크게 달랐겠는가마는 요즘이야말로 어느 때보다 우리의 마음을 쉬지 못하게 하는 여건들이 가득한 시대다. 잠시라도 마음을 챙기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어느새 外物을 따라 유랑하게 되고 우리 마음 속은 무수한 번뇌와 망상의 창고처럼 발디딜 틈이 없게 된다. 그렇다고 사방을 둘러봐도 어디 쉴 만한 곳이 없다. 그리고 쉴 시간도 없다. 아니 쉴 장소와 쉴 시간이 있다 하더라도 쉬는 방법을 모른다. 나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긴급한 것은 ‘쉼’이라고 생각한다.


쉰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쉬는 일과 정신적으로 쉬는 일로 양분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쉬는 일은 잠의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 적절한 시간에 출퇴근을 하는 것, 주말을 공휴일로 맞이하는 것, 자연과 함께 하는 것, 나만의 방을 갖는 것, 나만의 여백을 갖는 것 등과 같은 일이다. 인간은 육신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와 같은 물리적인 쉼은 우리 몸의 氣血을 잘 돌게 만든다. 그리하여 곧바로 생기와 활력, 평화와 안정이 찾아오게 한다.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에게 방학은 가장 큰 물리적 ‘쉼’의 시간이다. 이와 같은 ‘쉼’의 시간이 없이 계속해 학교에 등교하고 엄격한 시간표를 따라 공부를 하고 가르친다면 학습을 담당하는 이성적이고 경쟁적인 교감신경은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방학 때는 ‘放學’이라는 한자말 그대로 공부와 학습의 의무감에서 과감하게 놓여나야 한다. 그리고 제 나름의 생체리듬이 요청하는 心海의 無爲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 가능하면 이완된 상태에서 언어와 문명 이전의 시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개학과 더불어 탄력 있는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의욕적인 가르침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방학은 그런 점에서 개학이라는 陽의 시간을 후원하는 陰의 시간이자 陰德의 처소이다.


물리적으로 쉼의 시공간을 확보하는 일은 비교적 단순하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쉼’을 성취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육신은 한계를 잘 알지만 정신은 한계를 알기 어렵다. 그리고 그 속성 또한 복잡하다.
그러면 어떻게 정신적인 쉼을 창조하고 성취할 수 있을까. 정신적인 쉼의 창조와 성취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주어진 물리적인 쉼의 시공간조차 엉망이 되기 쉽다. 물리적인 시공간은 마음에 비하면 너무나 단순하고 소박한 까닭이다.


정신적인 쉼을 위한 제 1의 길은 ‘참나’를 아는 일이다. 에고를 넘어선 자아초월의 이 ‘참나’와 만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주와 합일되고 우주와 일체가 된다. 만해 한용운 선사가 그의 ‘悟道頌’의 첫 문장에서 ‘男兒到處是故鄕’이라고 말한 것처럼 발길 닿는 곳 모두가 본향이 되고 내 집이 된다. 그리하여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데서 오는 ‘客愁人’의 고통을 청산하게 된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의 정신적 쉼의 가장 큰 장애물은 ‘에고’이며 그 에고를 자기자신이라 여기는 오해다. 에고는 분명히 작은 나이자 현상적인 나이다. 그러나 그 너머에, 아니 그 이전에 진정으로 큰 나와 본질적인 나가 있음을 觀하고 체득할 때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安心立命에 이를 수 있다.


둘째로 정신적인 쉼을 위해서는 ‘願’을 세우고 ‘願力’을 키워야 한다. ‘원’과 ‘원력’은 에고가 자기중심적 욕망을 가지고 욕구하는 渴愛의 세계와 다르다. 이 시대는 ‘원’이니 ‘원력’이니 하는 것 같은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듯이, 일체를 세속적 소유와 경쟁의 개념으로 해석하고 평가하는 데 길이 나 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학생들의 공부는 물론 진리탐구에 매진하는 교수들의 교육행위와 학문연구까지 小我的 욕망의 일환으로 평가하고 제도화해 그야말로 이 세상 전체를 소인들의 천국으로 만들 기세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든지 간에 ‘원’과 ‘원력’은 정신적 쉼의 원천이다. 이들이 아니면 우리는 이 엄청난 ‘피로사회’에서 ‘자기착취’의 삶을 벗어날 수가 없다. ‘원’과 ‘원력’은 法界의 마음과 동행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원력행에선 그것이 비록 개인의 몸을 빌려 행해지는 것 같아도 그 주위엔 법계의 응원이 가득하고 그 저변에선 법계의 힘이 작용한다.
셋째, ‘法談’이야말로 정신적 쉼의 중요한 방법이다. 도반과 더불어 법담을 나누는 기쁨, 이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행위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수승한 것이다. 법담의 근저에는 ‘참나’가 있다. 이것은 에고를 중심에 놓고서 주고받는 중생담과 구별된다. 중생담은 그 독소가 대단하므로, 나는 농담 삼아 사람들 사이의 중생담이 가능한 최대치의 시간은 2시간 정도라고 말한다. 그 시간이 넘으면 모두 헤어져야 한다. 그렇게 하고서도 중생담의 여독을 필터링하려면 그 다음에 또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공자는 『논어』에서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라는 말을 했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친구를 ‘法友’ 혹은 道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친구가 멀리서 온다는 것이 그토록 기쁜 일일 수는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쉼은 우리 속의 자연과 자연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 엄청난 ‘火宅’의 세상으로부터 자신과 세계를 지키고 가꾸는 일이다. 새해에는 무엇보다 잘들 쉬어서 원기를 회복하시기 바란다.

□ 추천 릴레이 에세이 다음호 필자는 이규열 동아대 의과대 교수입니다.

 


정효구 충북대·국어국문학과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시읽는 기쁨 1-3』, 『한국현대시와 平人의 사상』, 『한용운의 『님의 침묵』, 전편 다시 읽기』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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