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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우리는 그를 비평가로 만날 수 있을까?
언제쯤 우리는 그를 비평가로 만날 수 있을까?
  • 최성만 서평위원/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 승인 2014.03.0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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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한국에서 벤야민은 오늘날에도 매체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정작 비평가로서의 벤야민의 면모는 가려져 있다.

발터 벤야민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에 활동한 유대계 지식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초기의 형이상학과 유대신학적 사유를 후기의 역사적 유물론의 사유와 결합해 독특한 사상을 펼친 문학비평가이자 이론가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작가였다. 그의 저작은 사후에 후배이자 동료인 테오도르 W. 아도르노에 의해 출간된다.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68 학생운동이 고조될 무렵이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 등이 속했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은 당시 이 운동의 이론적 토대인 ‘신좌파’에 영향을 미쳤고 이 과정에서 벤야민도 주목을 받는다. 이어 1970년대 초 『전집』이 출간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벤야민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활발한 수용사가 시작되고 이 상황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영미권에서도 한나 아렌트가 긴 서문을 쓰고 벤야민의 주요 글들을 모은 모음집(Illuminations, 1968)이 출간된 이래 그의 사상이 활발히 수용돼 왔다. 푸코, 데리다 등의 후기구조주의자들이 그랬듯이 벤야민의 사상도 영미권을 통해 전세계에 알려진 셈이다. 오늘날 벤야민 연구서들은 독일어권보다 외려 영미권과 프랑스에서 더 활발히 출간되고 있다. 나아가 벤야민은 유럽과 미국뿐만 아니라 각 문화권마다 다양한 맥락에서 수용되고 있는데, 가히 ‘글로벌 벤야민’이라 부를 만하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벤야민이 서구에서와 마찬가지로 각 나라와 문화권의 민주화 운동과 연계돼 수용된다는 점, 이런 정황이 시차를 두고 계속 이어지고 있는 점이다(터키, 이란, 브라질 등). 이 점은 필자가 지난해 9월 ‘벤야민 아카이브’(베를린) 주최로 베를린의 예술원에서 열린 벤야민의 세계적 수용 상황에 관한 심포지엄에 발표자로 참여하며 확인한 사실이다.


벤야민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70년대 초·중반으로 추정된다. 맨 먼저 소개된 벤야민의 글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다. 그것은 영미권에서 벤야민이 수용될 때에도 이 논문이 가장 인기를 끌었던 점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1970년대 유신정권에 저항하던 대학생들이 1980년 이른바 ‘민주화의 봄’을 맞을 무렵 대학에서는 ‘문학사회학’, ‘문학과 사회’와 같은 강좌들이 처음 개설된다. 그리고 이 강좌들에서 루카치, 아도르노, 벤야민, 브레히트 등 문학과 예술을 사회(사)와 연결해 관찰하는 유물론적 이론들이 다뤄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서구와 10여년의 시차를 두고 한국에서 벤야민이 대학생들의 민주화투쟁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면서 수용되기 시작한다.


일본의 경우 벤야민 사상은 서구에서와 거의 동시적으로 수용된다. 즉 벤야민은 1960년대 말 ‘전공투’(전국 학생 공동 투쟁회의)의 급진적 투쟁과 연관해 수용되는데, 당시 이 운동은 반권위주의, 반전, 풀뿌리민주주의 등을 주창한 프랑스, 서독, 미국의 학생운동 및 신사회운동과 유사한 기조를 띠었다. 중국의 경우에는 다시 한국보다 10여 년 뒤에 수용된다. 즉 중국의 민주화운동이라 할 수 있는 ‘천안문’ 사태가 발생할 무렵인 1989년 한국과 마찬가지로 기술복제-논문을 필두로 벤야민의 저작이 번역되기 시작한다.
특이한 것은 벤야민이 국내에서 기술복제-논문을 중심으로 수용되고 토론됐는데 이러한 사정이 지금까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한국에서 벤야민은 오늘날에도 매체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정작 비평가로서의 벤야민의 면모는 가려진 것이다.

벤야민이 기술복제-논문에 치우쳐 수용되는 것은 전 세계적 현상이기도 한데, 한국의 경우 매체기술과 문화산업이 급속히 발전한 점, 그리고 이 논문이 지닌, 기술에 우호적이고 낙관주의적인 경향이 그가 매체이론가로 수용되는 데 유리한 조건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벤야민은 뉴미디어의 변호인이 아니다. 국내에서 이 논문은 벤야민이 분명하게 언표하는 정치적 지향점이 은폐되거나 축소된 채 복제기술이나 대중문화의 긍정적 효과와 기능들에 치우쳐 수용된 면이 있다. 한편 이 기술복제-논문과 비교할 때 벤야민의 사상이 집약된 ‘역사철학테제’와 같은 글들은 미미하게 수용됐다. 그렇지만 이러한 편향된 수용 상황은 제대로 된 번역이 이뤄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토론이 활성화된다면 앞으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 기술복제-논문과 더불어 벤야민의 또 다른 텍스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데 「폭력비판을 위하여」가 바로 그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2001년 9·11 테러의 효과다. 이후 테러의 시대, ‘테러와의 전쟁’의 시대가 열리고 1990년대를 풍미하던 포스트모더니즘이 퇴조하기 시작한다. 최근에는 폭력론과 더불어 정의론, 정치철학, 정치신학, 신학의 귀환과 같은 주제들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벤야민이 이러한 담론에서 자주 인용되며 등장한다.


한국에서 이론의 생산·전달·수용은 주로 서구에서 영향을 받아 유행처럼 이뤄져 왔고 이 사정은 오늘날에도 별로 다르지 않다. 푸코, 데리다, 들뢰즈가 1980~90년대 한국 사회를 풍미한 것도 서구 이론 지형에서 받은 영향 때문이다. 즉 벤야민은 2000년대 이후 슬라보예 지젝(슬로베니아), 조르조 아감벤(이탈리아), 알랭 바디우(프랑스), 자크 랑시에르(프랑스), 지그문트 바우만(영국), 테리 이글턴(영국), 데이비드 하비(미국), 수잔 손탁(미국), 프레드릭 제임슨(미국), 수잔 벅 모스(미국), 주디스 버틀러(미국) 등에 의해 거듭 언급되고 참조되면서 이들을 통해 한국에서도 벤야민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벤야민 선집』을 출간하는 길 출판사의 주최로 2013년 봄 정독도서관에서 벤야민의 사상을 조명하는 심포지엄이 개최된다. 심포지엄 제목도 ‘벤야민 커넥션’이었다. 이틀 간 치러진 이 행사는 판매된 프로시딩이 5백 부가 넘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한국은 오늘날 빈약한 독서문화, 위축된 인문학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담론을 수용하는 데서 어느 나라보다 열정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1980년대 말부터 영문학자들을 중심으로 미국에서 대거 수입되기 시작했고, 후기구조주의, 오리엔탈리즘,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의 노마디즘, 탈식민주의 담론 등이 동시에 수입되거나 그 뒤를 이었다. 이처럼 서구에서 생산된 이론들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수입되지만 그것을 한국의 주체적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종합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현실이다. 그러나 연구성과들이 축적되면서 상황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 과정에서 벤야민 사상이 학자들의 연구 대상을 넘어 독자들에게 다양한 자극을 주는 과정도 소리 없이 진행될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 기대를 걸어본다.

 


최성만 서평위원/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필자는 베를린자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발터 벤야민 선집』 번역을 주관하고 있으며, 하우저의 『예술의 사회학』(공역), 『한 우정의 역사: 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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