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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의미와 문화
죽음의 의미와 문화
  • 김환규 서평위원/전북대·생명과학과
  • 승인 2014.03.1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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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인체는 하나의 수정란으로부터 유래한다. 신생아는 약 1조개의 세포로 이루어뤄져 있으며 성인이 돼서도 매일 수십억 개의 세포들이 분열함으로써 손상되거나 노후한 세포들을 대체한다. 즉 고등생물에서 세포분열의 역할은 죽은 세포를 교체하는 것이다. 세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죽는다. 첫 번째 종류인 괴사는 세포가 기계적 도구나 독소에 의해 손상되거나 영양소가 부족할 때 일어난다. 다른 세포죽음 방식은 세포자살이다. 세포자살은 세포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프로그램화된 일련의 과정이다.


사람의 개별 염색체는 DNA 복제 및 세포분열 시 약 50~200 염기쌍 정도의 말단소체(염색체 끝 부분) DNA를 잃게 된다. 20~30회 분열 후에 염색체는 더 이상 세포분열에 참여할 수 없게 되고 그래서 세포는 죽게 된다. 이 현상은 많은 세포계통이 한 생물의 일생동안 지속되지 못하는 부분적인 이유다.


하지만 골수줄기세포와 정자형성 세포처럼 지속적으로 분열하는 세포는 말단소체 DNA를 계속 유지시켜주는 말단소체복원효소가 존재해 이들 세포에서 잃어버린 말단소체 DNA 서열을 회복시켜 준다. 이러한 말단소체복원효소는 사람 암의 90% 이상에서 발현된다. 대부분의 정상세포는 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세포의 수명이 유한하며 노화기 진행되는 이유의 일부이기도 하다. 배양중인 사람 세포에 고농도의 말단소체복원효소 유전자를 발현시키면 말단소체는 짧아지지 않고 세포는 영생한다. 진시황이 찾던 불로초가 여기에 있는 셈이다.


사람이 죽게 되면 사체에 다양한 분해자가 몰려오게 되는데 사체에 서식하는 종 군집은 시간과 부패가 진행됨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완전 분해에 이르는 시간적 규모는 며칠에서부터 몇 천 년에 걸쳐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먹이망을 통한 에너지의 흐름은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을 따른다. 즉 인간의 죽음이란 생태계적 입장에서 보면 한 영양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에너지의 전반적인 전달과정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숙명이지만 죽음을 대하는 문화 역시 다른 사회 분야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변화를 겪어왔다. 예전엔 죽어가는 사람이 죽음의 주연이었지만 지금은 의사와 간호사가 주연이고 정작 본인은 병원이나 요양원을 찾는 손님 중의 한사람일 뿐이다.


죽음에 대한 문화적 변화를 추적한 사람이 필리프 아리에스(PHILIPPE ARIE´S)이다. 그는 1973년에 존스홉킨스대에서 행한 강연과 1966년~1975년 사이에 발표한 12편의 논문을 모아 『죽음의 역사(Essais sur l’histoire de la mort en Occident du Moyen Age a´ nos jours』(이종민 옮김, 동문선, 2002)를 출간했다. 그는 인간의 영원한 거주지인 묘지로부터 죽음과 문화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노력했으며 20세기 미국의 상업화된 죽음의 이미지를 추적했다. 그는 죽음의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로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국면을 지배하는 주권자로 존재해 왔으나 오늘날 그런 존재의 위치를 박탈당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인간은 시대가 흐를수록 그리고 사회화와 도시화의 단계가 진전될수록 자신의 죽음에 대한 준비를 자신의 주위 사람들에게 더 의존하게 됐다. 근대사회는 인간으로부터 그의 죽음을 탈취한 것이다.


아리에스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길들여진 죽음’, ‘자신의 죽음’, ‘타인의 죽음’, ‘금지된 죽음’의 네 영역으로 나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길들여진 죽음’은 前 기독교 시대에서 초기 중세까지 해당되는 것으로 이 시대 사람들은 죽음을 영원한 수면으로의 이동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죽음은 사회적이었으며 장례절차는 그 사회에서 중심이었다. 이때까지의 죽음은 죽어가는 자가 주인이었으며 변화에 순응하는 한 죽음에 대한 전통적 태도는 무기력과 지속성의 총량으로 생각했다. 인간은 죽음 속에서 種의 법칙들을 감내하며 그것을 피할 생각도 찬양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시대의 인간은 종의 집단적 운명에 순종했다.


아리에스는 당대 작가들의 문학작품에서 자신의 이론적 자양분을 찾아내 죽음을 둘러싼 삶의 양식을 꿰뚫어 보기도 했다. 예를 들면 돈키호테는 자신의 삶을 이미 자신의 망상 속에서 소모시켜 버렸기 때문 자기의 죽음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을 예고하는 신호들이 그를 이성으로 이끌어간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죽음 시대’는 중세에서 후기 중세 시대에 해당된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실존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터득했다. 즉 18세기부터 서구 사회의 인간은 죽음을 찬양하고 극대화시키면서 그것에서 감동을 얻고 그것을 독점하려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타인의 죽음’과 ‘금지된 죽음’은 가장 현대화된 민속이라 할 수 있다. ‘타인의 죽음’은 낭만주의 운동 시기와 상응하며 ‘금지된 죽음’은 세계 제2차 대전 후의 미국 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이 시대의 죽음은 일련의 작은 단계들로 해체·분할됐다. 이제 죽음은 진료의 중단을 통해서, 즉 의사와 진료 팀의 결정을 통해서 획득된 기술적 현상이 된 것이다.
죽음에 대한 특정 시대의 사회가 갖는 태도의 대부분은 그 당시의 위생학 및 의학지식에 근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철저하게 위생적으로 관리되는 현대의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제도화된 의학적 기술을 반영한다.


이 책에서 아리에스는 죽음을 둘러싼 절차와 상징을 통해 각 시대에 따라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고자 노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죽음의 시대’가 죽음과 연관된 우리의 인식 단계에 따라 점차 진화적으로 변화해왔으며 각 단계는 인간본성의 실제적 재정의를 나타낸다고 보고 있다.


김환규 서평위원/전북대·생명과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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