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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르릭크 언덕, 그곳은 정말 트로이였을까
히사르릭크 언덕, 그곳은 정말 트로이였을까
  • 세바스티안 뮐러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HK교수
  • 승인 2014.03.18 15: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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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이야기 12_ 트로이-끝나지 않는 원정

▲ 트로이의 유적지에 남아있는 잔해 출처 위키피디아 커먼스

트로이의 발굴은 하인리히 쉴리만이 1869년에 오토만 제국의 아나톨리아 서쪽 해변에서 가까운 히사르릭크(Hisarlik) 언덕의 발굴에 대한 허가를 신청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이미 전설의 도시 트로이를 발견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1822년에 독일에서 태어난 성공한 사업가였던 쉴리만은 미국의 철도 산업에 투자해 부호가 됐지만 42살에 문득 은퇴를 선언한다. 이후 그는 자신의 시간과 돈을 여행과 고대 문명 연구에 받치리라고 결심한다. 그의 관심은 다름 아닌 고대 그리스의 전설, 특히 트로이 전쟁의 서사에 나오는 잊혀진 장소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고고학자 쉴리만의 功과 過
그리스의 전설적인 작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지중해 문명과 유럽 문화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사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일리온(Ilion)-‘트로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의 젊은 왕자인 파리스는 신들의 전령인 헤르메스에게서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중 제일 아름다운 여신을 고르라는 요청을 받는다. 세 여신들은 모두 자신이 선택되기를 원하며 파리스에게 대가를 약속한다. 헤라는 파리스에게 권력을, 아테나는 그에게 영웅의 명예를,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줄 것을 약속한다. 파리스는 아르포디테를 선택하고 이로 인해 아름다운 헬레나-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를 만나게 된다. 헬레나는 파리스와 사랑에 빠지며 파리스를 따라 에게해를 건너 막강하고 부유한 도시 트로이로 항해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아카이오이족(Achaeoi)이라 불린 그리스인들은 헬레나를 되찾고자 대함대를 결집해서 아나톨리아 해안으로 출동한다. 메넬라오스의 동생이자 미케네의 왕인 아가멤논이 통솔하는 함대였다. 그리스인들의 요구에 응할 의사가 없었던 데다가 막강한 방어력을 자신했었던 트로이는 이후 십년에 걸쳐 그리스 인들의 포위 하에 기나긴 전투를 치러야 했다. 트로이는 마침내 유명한 영웅 오뒷세우스의 책략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고국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끝없는 전쟁에 지쳐가던 와중에 그리스군은 오뒷세우스의 지휘에 따라 거대한 목마를 만들고 그 안에 병사들을 숨겨둔다. 그리스 함대가 해안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본 트로이인들은 해변에 남아있는 목마를 그리스가 항복의 표징으로 남겨둔 제물로 여긴다. 그들이 목마를 도시 안으로 들인 후 목마 안에 숨어있던 그리스인들이 밤중에 트로이의 성문을 열었고 트로이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재빨리 돌아온 그리스 군에 의해 함락됐다. 도시는 약탈당하고 파괴됐으며 시민들은 살해되거나 노예가 됐다.


‘육보격(hexameter)’이라 불리는 운율로 지어진 호메로스의 작품에 관해 많은 논의가 이뤄져 왔다. 특히 전쟁에 대한 묘사가 실제 역사적 사건에 기초한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문학적 상상력이 개입된 것인지의 문제는 학자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호메로스와 동시대의 문헌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정답을 찾기는 어렵다. 호메로스의 시가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다고 믿는 학자들도 호메로스가 다루는 시대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를 보인다. 정치제도나 전투방식, 그리고 무기류를 비롯한 물건들에 대한 묘사와 그러한 물건들이 만들어진 재료는 후기 청동기 시대(B.C. 1700~1200)나 초기 철기 시대의 초반부와 맞아떨어진다. 기원전 8세기에 살았던 호메로스가 그보다 몇 세기 전에 일어난 사건을 주제로 서사시를 썼다는 것인데, 이는 그의 서사시가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 작용한다.


쉴리만이 현대 고고학의 선구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발굴 방법은 날선 비판을 받아왔다. 히사르리크 언덕의 정착지는 트로이 전쟁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에도 몇 세기동안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그러나 쉴리만은 호메로스의 트로이 시기에 해당하는 정착지 층을 발견하기 위해 대규모로 언덕을 파내려갔다. 오늘날 고고학의 발굴 방식과는 다르게 쉴리만은 파내려간 각 층의 구조를 기록하지도 않았고 층별로 체계적으로 발굴하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쉴리만은 단층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고, 결국은 훨씬 이전의 초기청동기 시대(B.C. 2550~2200)의 요새층을 호메로스의 트로이라고 결론지었다. 우연히 값진 금속 그릇들과 청동 무기 및 금으로 된 머리띠 장식 등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이 발굴품들을 ‘프리아모스 왕의 보석’이라 명명하며 호메로스의 트로이를 발견하는데 성공했음의 증거로 제시했다. 전문가들에 의해 이 발굴품들이 명백히 트로이 전쟁의 추정연도보다 훨씬 앞선 시기의 것임이 밝혀졌지만, 어쨌든 쉴리만은 대중적인 관심과 명성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쉴리만의 시절부터 현재까지 히사르릭크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터키와의 협력 하에 독일과 미국의 많은 연구소들에서 진행돼왔다. 히사르릭크가 트로이 도시였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히사르릭크에 대한 연구는 트로이를 포함한 모든 정착 시기에 대해 행해졌다. 총 열 개의 주요 정착 시기가 발견됐고 각 시기는 여러 세부시기로 나뉜다. 히사르릭크에 집중된 발굴은 이 언덕을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장소로 만들었다. 지금은 이 언덕이 시대적으로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했는지 뿐만 아니라 타지역과의 무역과 정치 관계는 어떠했는지도 알 수 있다.

호메로스 서사시에 대한 의구심
그러나 아직도 충분히 규명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 바로 트로이 전쟁 추정시기에 해당하는 정착지의 역사적 진위의 문제이다. 호메로스는 트로이를 지역간 권력의 중심지로 묘사했다. 히사르릭크에서 발견된 당시 정착층의 구조는 최근까지도 이 점을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다. 다만 최근 십 년간 히사르릭크를 둘러싼 지역에서 이뤄진 현장발굴에 의해 언덕 아래 부분에 커다란 도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게 됐다. 만약 참호에 둘러싸인 이 지역에 대단위의 인구가 정착해 살았다면 히사르릭크는 틀림없이 이 지역의 정착 구조에서 아주 중요한 입지를 가진 중심지였을 것이다.


전설의 도시 트로이에 대한 탐구는 계속된다. 단지 오래된 서사시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니다. 이 탐구는 유럽 문화의 집단적 정체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고대 유산의 기원을 밝히려는 시도이다. 번역= 지중해지역원 번역팀

세바스티안 뮐러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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