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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학은 제대로 된 지성인을 키우고 있는가
한국 대학은 제대로 된 지성인을 키우고 있는가
  • 교수신문
  • 승인 2014.04.15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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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론

남송우 부산문화재단표 / 부경대 국문학
최고의 학식을 가진 지성인인 교수들이 모여 연구하고, 교육하며 또 다른 지성인을 육성하는 곳이 대학이다. 그래서 대학은 전통적으로 지성인의 집단으로 통한다. 그동안의 대학의 역사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지금도 대학이 지성의 집단이란 별칭은 그대로 달고 있다. 그런데 과연 지금의 대학이 지성인의 집단으로서 역할과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대학에 몸을 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솔직히 시원한 답을 할 수가 없다. 대학의 현실이 지성인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필자 자신의 현재의 삶에 대한 반성문임을 먼저 고백해둔다.

대학교육의 핵심
대학은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교수들이 지성인으로 살아갈 예비 지성인들을 키우는 곳이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 교육의 중심이기에 전공분야의 지식 습득과 인격의 함양은 가장 기본적인 대학교육의 두 축이다. 그러나 인격함양이란 한 축은 허물어진 지 오래다. 교양교육의 강화를 통해 세계를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비판적 지성인을 육성하고 있지만, 대학들마다 교양교육의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그래서 전통적인 지성의 전당은 이제 취업을 위한 훈련소 혹은 준비소로 전락하고 있다. 학생들은 오직 취업을 위한 소위 스펙쌓기에만 몰두하고 있다. 지성인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비판적 사고의 훈련이나 새로운 세계창조를 위한 근원적 성찰력의 함양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대학의 교육풍토는 세상에 상존하는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근원적인 진리를 향한 학문적 사유보다는 실용적인 도구로서의 전문지식 전수에만 열을 올리게 하고 있다. 국가가 많은 예산을 투자해서 정책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대학교육 역량강화 사업의 내용도 심도 있게 분석해보면, 현실적 실용성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지성인을 키우는 대학교육은 맞춤식 교육을 넘어설 창의적 사고 훈련을 통해 어떤 문제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문제해결능력의 소유자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문제해결 능력의 습득은 철저한 비판능력의 교육으로부터 시작된다. 대학이 이러한 근원적인 사고훈련 교육을 포기하면 대학은 지성인을 키우는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다. 지성인은 현실의 부조리를 근원적으로 초극할 대안 마련을 위한 비판적 창조력을 소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학교육이 왜 이런 모습으로 바뀌고 있는가. 사회의 변화가 큰 하나의 원인임에 틀림없다. 급속도로 변하고 있는 사회는 그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인간상을 필요로 하고 있고, 풀리지 않는 경제적 상황은 젊은이들을 오직 일자리 찾기에 급급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졸업생들의 취업률로 대학을 평가하는 시스템이 고착되면서 대학교육은 지성인을 키우기보다는 직업인을 배출하는 쪽으로 기울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의 전개는 사회적 변화 요인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대학인들의 자성이 필요하다. 사람교육은 상당부분 사람에 의해 이뤄진다. 예비지성인을 키우는 대학교수들이 얼마나 학생들에게 지성인의 모델로서 역할을 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대학이 기업경영처럼 경쟁체제로 바뀌면서, 교수들은 지금 학생교육에 전력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연구에 모든 시간과 정력을 다 쏟고 있다. 학교경쟁력은 교수들의 객관적인 연구실적의 높낮이에 의해 결정된다는 대학평가제도 때문에 교수들은 오직 연구에만 열을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려 있다. 모든 교수들이 교육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교수평가에 유리한 연구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성과급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연구에 저당잡힌 교수들은 교육을 통해 진정한 지성인을 키우는 일에는 관심이 엷어져가고 있다. 교육에 대한 열의가 식어져 가고 있다는 것은 대학교수 스스로 교육자로서의 지성인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다.

대학에 몸담은 지성인들은 늘 대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확인된 본질과 진리에 대해서는 실천적 양심을 견지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본질을 왜곡하고 진리를 쉽게 저버릴 때 지성인의 자리는 사라지고 만다. 대학이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고 직업인 양성소로 전락해가는 현실을 바라보며, 대학교수들은 얼마나 대학의 본질을 지켜나가기 위해 몸부림쳐 왔는가? 이 질문에 우리 모두가 떳떳하게 대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체질적으로 허약해진 지성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왜 이런 허약한 체질의 지성인 집단으로 현재의 대학들이 전락하고 있는가. 부단한 자기개혁이 뒤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지성인이 부단한 자기비판과 성찰 없이 타자만을 향해 비판의 화살을 날릴 때, 세상은 근원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부단한 자기개혁의 실천 없이는 타자의 변화를 유도하기는 힘들다. 한때, 모든 사람들에게 한 시대의 지성인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변절의 모습을 보이거나 지성인의 기대치를 견지하지 못하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개혁을 통한 자기성찰의 삶을 이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성인의 삶을 산다하더라도 자신을 제대로 지켜나가지 못할 때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부단한 자기성찰이 늘 뒤따르지 않으면 지성인의 자리는 흔들리고 마는 것이다.

변화의 시대가 요구하는 지성인像
대학 내에서 지성인들의 역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지성인들의 대사회적 역할도 크게 위축되고 있다. 지난 시절 민주화과정에서 지성인들의 역할은 민주화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지만, 다원화된 이 시대에 있어서는 다양한 전문영역별로 지성인의 자기 역할은 분화될 수밖에 없다. 지성인들이 관여하는 영역이 세분화되고 거대집단의 지성인 단체가 소멸되는 현상이 나타남으로써 지성인의 대사회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별히 영역별 지성인 집단의 대표격인 다양한 전문 학회들의 대사회적 역할이 새롭게 강조돼야 한다. 지성인의 역할은 자기 전문영역에 현존하는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을 창안함과 더불어 이것이 현실 속에서 제대로 실현될 수 있도록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역할을 통해 사회를 선도하는 계기를 항상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공 속에 갇혀 이론적 담론창출에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공이 현실화된 현실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안들에 대해 항상 능동적인 비판을 통해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학문의 영역이 전문화되고 세분화되면 될수록 대사회적 역할은 더욱 강화돼야 한다. 전문 영역의 세분화로 학문연구 자체가 그 영역 안에 스스로 갇혀버릴 가능성을 너무 많이 안고 있기 때문이다.


지성인들이 대사회적 역할을 감당하면서, 항상 문제가 돼 온 것은 학자적 양심의 견지이다. 도덕성이 담보되지 않은 지성인의 사회적 역할은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시대적 가치관을 전복시키기만 한다.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려고 했던 근대화 시절의 가치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도 대학에서 부정과 비리의 소식이 들린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사회의 바람직한 가치관을 세워나가는 데 지성인들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의 삶의 행복지수는 밑바닥을 헤어나기 힘들다. 신자유주의 정신에 편승한 자본논리의 횡행과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팽배는 우리의 공동체의식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고, 이는 우리 사회의 삶의 풍토를 더욱 각박하게 만들었다.


지성인들이 이제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나누는 나눔문화의 주역으로 나서, 공동선의 가치를 세워나가야 한다. 공동선의 구축과 실현은 다원화된 영역간의 열린 사고와 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 사회가 발전해 가면 갈수록 상대적으로 많은 것을 소유한 지성인들에게 요구하는 짐은 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제 대학의 지성인들은 대학내부의 변화에 대한 대응만으로 고민할 것이 아니라, 대학 밖의 다양한 현실 영역 속에서 대학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시기이다. 모든 대학들이 지금 어려운 시간대를 보내고 있지만, 대학이 풀어가야 할 문제들이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참된 지성인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다. 존경의 관이 씌어진 데는 그만큼의 부단한 자기성찰과 고통스런 자기희생의 실천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안주하며 자기욕망의 성벽에 갇혀있는 지식인에게는 지성인의 명패를 새겨줄 수는 없는 것이다. 아직도 지식인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아상을 바라보며 부끄러워할 뿐이다.

- 필자는 부산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2011년 1월 부산문화재단 대표이사에 선임돼 부산지역문화예술 발전에 앞장서 왔다. 한국문학회, 동북아시아문화학회 학회장을 역임했으며, 지은 책으로는 『전환기의 삶과 비평』, 『생명시학 터닦기』 등이 있다. 일찍이 <오늘의 문예비평>을 창간, 부산의 독자적 비평을 모색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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