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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元亨利貞의 여정 …동방을 향한 문명 귀환의 가능성
새로운 元亨利貞의 여정 …동방을 향한 문명 귀환의 가능성
  • 김정하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HK연구교수
  • 승인 2014.07.29 14: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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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이야기_ 21.이탈리아 문화

▲ 콘스탄티노플과 중국을 이어주는 고대 북방실크로드와 지역 토산품

체성은 相通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것은 궁극적으로 남을 위한 배려이며 공존을 위해 실천해야 할 ‘한 몫’이다. 사회 공동체나 국가의 경우에도 고유한 정체성 요인들은 ‘나’와 ‘우리’만을 위한 인위적인 자연스러움을 넘어 다른 주체들과의 관계를 추구한다.

흔히 사람들은 정체성 요인들이 일관되고 논리적인 원리만을 따른다고 생각한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형성 배경을 보면 정체성 요인들은 ‘닮음’과 ‘다름’의 외피 속에, 서로 통하는 대칭성을 가진다. 약초에 약효가 있는 것은 그 속에 독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 형성된 이탈리아 정체성의 요인들은 대칭적 공존의 특징을 보여준다.

역사 속 대칭적 정체성의 형성
이탈리아의 역사는 로마제국의 지배, 자치도시들의 해상활동, 외세의 지배에 의한 ‘정체의 시대’ 그리고 19세기의 통일로 전개됐다. 제국의 지배 하에서는 수도 로마를 품은 채 제국의 중심에 위치했다. 476년 서로마가 몰락한 이후에는 게르만족의 유입과 중앙권력의 붕괴 그리고 지중해 해상활동의 분열로 인해 유럽의 중심에서 멀어졌는데, 특히 9세기 초반 프랑크 왕국이 성립된 이후에는 유럽 정치권력의 변두리에 오래 동안 머무르게 됐다.

하지만 제국의 분열은 중앙권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새로운 역사접변의 모테로 작용했으며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그리고 아말피(Amalfi)와 같은 해상공화국들의 지중해 중계무역활동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유럽사의 권력 패러다임이 알프스 이북으로 옮겨간 시점에서 대륙의 농업적 기반(장원경제)과 지중해의 상업 및 교역 활동은 공존과 균형의 변화를 거듭했다.

14∼16세기에는 반도의 해상공화국들이 지중해의 동부와 남부에 걸쳐 방대한 제국을 형성한 아랍-무슬림과의 접촉을 통해 4대강 중심의 대문명세계와 관계를 본격화하면서 부의 축적과 더불어 대륙문명 간 교류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었다. 이 기간은 반도의 역사는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가장 의미 있는 순간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위대함을 누렸을 뿐 이어가지를 못했으며 아랍-무슬림과 마찬가지로, ‘문명 전달자’로서의 역할에 머물러야 했다. 결국 이탈리아 반도는 유럽정치권력의 지정학적인 변화에 편승하지 못했고 수많은 외세의 간섭과 침략으로 오랜 ‘정체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탈리아의 통일(1861)은 이탈리아인에 의한 반도의 지배를 상징하는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중북부의 자치적인 경험과, 남부의 시간을 관통했던 오랜 전제주의적인 지배는 하나의 국가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봉합되지 못한 채 정신-문화적인 괴리와 더불어 곪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처럼 이탈리아에 있어 로마제국 이후의 시대가 주변세력들과의 불순한 異體陰陽의 여정이었다면,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내부적으로도 ‘남북문제’라는 또 다른 이체음양의 잔재와 더불어, 시칠리아의 경우 同體陰陽의 대칭적 문화정체성이 형성됐다.

르네상스, 세계 다문화 문명의 꽃피움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산실이다. 오늘날 르네상스에 대한 보편적인 견해는 그리스-로마 고전의 재흥이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북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다문화 접변에 의한 ‘문명의 꽃피움’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 고중세 시대의 북방 및 남방 실크로드와 문명 간 교류의 흐름, 15-16세기 서유럽 팽창기의 교역로. 영국과 북유럽에서 스페인과 이탈리아(로마)를 관통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성지의 길(검은색)과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북방 실크로드의 여정(붉은 색) 그리고 아프리카를 포함하는 남방 실크로드의 여정(보라색)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만난다.

이탈리아의 통일(1861년)은
이탈리아인에 의한 반도의 지배를
상징하는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중북부의 자치적인 경험과, 남부의 시간을 관통했던 오랜
전제주의적인 지배는 하나의
국가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봉합되지 못한 채 정신-문화적인 괴리와 더불어 곪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Mare nostrum’의 중심에 위치한 이탈리아에는 영국과 북유럽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북동부에 위치한 파티마로 그리고 로마를 거쳐 예루살렘 성지로 이어지는 중세 시대의 ‘성지순례의 길’(Via Francigena)이 관통하고 있었다. 한 때는 ‘로마 길’(Via romana)로 그리고 게르만이 남하하던 시기에는 ‘랑고바르디 족의 길’로도 불렸던 이 통로는 사람과 물품을 통해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교류했던 고대의 길이기도 했다.

또한 이탈리아 반도는 지중해 동부지역과 터키 그리고 인도를 지나 말라카(Malacca)의 몬순 바람을 타고 극동아시아에 도달하는 머나먼 남방 해양 실크로드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했다. 해양 문명 간 교류의 여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항구들은 주변의 지역들에서 모여든 지역토산물들을 선적하거나 하역하는 일상의 움직임으로 부산했을 것이다. 이러한 통로들은 인류의 문명을 대표하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그리고 중국의 거대문명권을 바닷길로 이어준다. 이탈리아, 특히 북동부에 위치한 베네치아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에게서 알 수 있듯이, 흑해와 카스피해를 지나 중국에 도착하는 유라시아 실크로드의 시작이자 종착역이다. 물론 남방과 북방의 두 실크로드는 부카라(Bukhara), 타실라(Taxila) 바르바리콘(Barbarikon) 또는 마투라(Mathura)와 같은 중간기착지들을 통해 서로 연결돼 있었다.

이처럼 이탈리아 반도는 세계의 모든 문명권들과, 때로는 사람들로 때로는 이들이 생산한 수많은 물품들의 교역활동으로 서로 연결돼 있었다. 그리고 14∼16세기에 지중해는 세계 다문화 문명의 길들을 통해 전승된 문화와 과학(기술)의 결실들이 집산된 거대한 다문화 문명의 항구로 거듭났다.
 
새로운 미래 문명의 출발점
르네상스 문명의 꽃피움은 유럽만의 힘으로 된 것도, 유럽만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과거 지중해에 불던 문명의 바람은 동남풍이었다. 지중해의 끝자락에 도달해 유럽의 북서부 지역으로 향했던 물질문명의 바람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자연은 1년 내내 같은 방향으로만 바람을 불게하지 않는다. 음양의 순환은 1년을 한 주기로 바람의 방향을 바꿔 놓는다.

역사 또한 어느 한 편의 노력만으로는 繹繹되는 무늬가 아니다. 자연의 이치를 벗어나서는 아무런 상식도 기대할 수 없다. 한 편의 영향력이 지배적인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순간은 영원하지 않으며, 시간에 흐르지 못한 채 그 속에 닫혀있는 우리의 생각만이 그렇게 믿을 뿐이다.

▲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 주의 안드리아에 위치한 카스텔 델 몬테(Castel del Monte). 1240년 경 황제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가 건설했다.
지중해가 품었던 이탈리아는 앞으로 다가올 세계 문명 간 상통과 접변의 새로운 그 무언가를 위한 단초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에 침잠된 대칭적 정체성은 과거 서방을 향했던 문명 패러다임의 관문이었던 만큼, 다가올 미래에 있어서는 동방을 향한 문명 귀환(또는 신문명 패러다임)의 명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옛 것이라 해서 모두 같은 계절에 속한 것은 아니다. 같은 것으로 보일뿐, 본질적으로는 서로의 시기를 달리하면서 새로운 元亨利貞의 여정을 추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물품들에 집착한 채 기억 속에만 쌓아두려 한다. 우리의 행위가 거기까지일 때, 과거 그 자체도 지난 시대에 대한 향수에 머문다. 새로운 자원으로서의 가치는 미래의 달라진 환경을 위해 어떻게 변화를 거듭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만들어진다.

서구문명의 이성은 사회 속 구성원들 간의 균형관계를 주목했을 뿐, 인간과 자연의 보편상식적인 관계는 외면했다. 이러한 이유로 서구의 역사에서 자연은 항상 극복과 정복의 대상이었으며 이에 앞장 선 사람은 목적 달성의 여부에 관계없이 위대한 영웅이었다. 인간과 자연은 相剋, 즉 이겨야 할 상대가 아니라 極卽通, 함께 어울려할 대상일진데 말이다.

김정하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HK연구교수

 


 

중세 이탈리아 중북부 자치도시들의 특성

중세 서유럽의 역사에 있어 자치도시의 역사는 11세기 경 이탈리아 반도의 중북부지역에서 시작됐다. 이후 12~14세기에는 독일의 중남부와 플랑드르 지역에서도 중소규모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자치적인 삶의 형태가 등장했다. 자치적인 삶의 형태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은 특히 프랑스, 영국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의 자치도시들과 그 발전과정에 있어 많은 다양성을 보여준다.

자치도시 문명의 요람인 이탈리아의 경우, 자치도시의 현상은 이미 13세기 말, 14세기 전반에 접어들면서 정치적인 균형의 변화를 통해 쇠락하기 시작했는데, 새로운 사회계층의 등장과 새로운 통치방식들의 실험―도시 시뇨리아(Signoria)―이 그 주된 원인이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11세기 이후 인구증가와 농업생산량의 증가였다. 봉건제도의 영향이 비교적 적었던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공증인, 판사, 의사, 소규모 수공업자들 그리고 상인들이 등장과 관련된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물들인 부르주아 계층을 형성했는데, 봉건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면서 중세의 사회적 변화를 이끌기도 했다.

반도의 중북부에 위치한 자치도시들은 이탈리아의 역사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시대의 상징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에 이탈리아 남부는 이미 고대부터 그리스, 페니키아, 카르타고,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중세에는 게르만, 아랍, 노르만, 프랑스의 지배를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아라곤, 스페인, 오스트리아 그리고 통일된 이후에는 사보이아 왕가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5천년을 이어온 피지배의 역사,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던 저항정신. 유럽역사의 일부로 간주하기에는 반도의 중북부와 알프스 이북의 역사적 전개와 대칭적 역사의 흐름은 자신의 특성을 고스란히 유지한 독자성이 너무나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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