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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가 아닌 철학적 대화로 자신의 길 찾아가기
치료가 아닌 철학적 대화로 자신의 길 찾아가기
  • 김선희 이화여대 초빙교수·철학
  • 승인 2015.03.30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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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철학상담: 나의 가치를 찾아가는 대화』김선희 지음|아카넷|356쪽|20,000원

이 책은 자아정체성의 이해에 토대를 두고 내담자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다룰 수 있기를 기대하며 수행한 철학적 대화의 산물이다. 자아정체성에 대한 물음 안에서 자신의 고민과 문제를 비춰보며 철학적 대화를 나눴던 상담 프랙티스에 토대를 뒀다.

 
일의 아헨바흐가 1980년대 철학실천을 창시한 지 30여 년이 지난 상황에서, 철학상담에 대한 담론들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상담이 무엇이며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과 의구심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그런 논란의 배후에는 다음 두 가지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첫째는 철학상담에 대한 정의나 이해를 여전히 심리상담과 비교해 규정하려는 의존적인 접근방식에 머무르거나, 혹은 철학상담을 심리치료나 여타의 치료와 모호한 방식으로 결합하는 융복합적 접근에 쉽게 의탁하려는 경향이다. 둘째는 더욱 중요한 문제로서 철학상담에 대한 담론들이 이론적 차원이나 기존의 주어진 상담사례들을 철학적으로 조명하는 메타담론에 치중함으로써, 철학상담의 구체적인 실천사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상담 고유의 방법으로 이뤄진 성공적인 사례들이 축적되지 않고서는 철학상담의 정체성 논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며, 철학상담의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바로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치료가 아닌 철학적 대화

이 책에서 나는 철학상담을“철학적 대화로 이뤄지는 상담활동”으로 규정한다. 즉 철학상담은 철학적 사고와 방법을 대화로 구현하는 철학 본연의 활동이다. 나는 기존의 어떤 치료법도 도입하지 않고 내담자의 문제에 대해 오직 철학적 대화로 상담해온 경험과 사례를 통해 철학상담이 무엇인지, 철학자는 어떻게 상담하는지 보이고자 했다. 물론 철학적 대화의 주제는 내담자가 가지고 온 삶의 문제와 고민들이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대화하는 방식은 넓은 의미의 비판적 사고를 포함하는 철학적 활동이 중심을 이룬다.

철학상담사가 만나는 문제들은 삶의 의미상실과 죽음 등의 실존적 문제, 우울감, 무기력과 권태, 진로, 우정, 부모나 가족 갈등, 자녀양육과 교육, 만남과 이별, 배우자나 연인관계, 결혼과 이혼, 선택과 책임, 가치관의 문제, 여성정체성, 대인관계, 파편화된 삶, 자존감 결여, 열등감과 자기비하, 남의 시선과 평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 등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평범한’사람들의 고민이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어떤 질환을 가진 것은 아니며 정신병리학이나 심리치료의 대상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들의 고민에는 병리적이거나 심리적인 접근보다 철학적 대화로 다루기에 적합한 문제가 포함돼 있다.

이 책은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만났을 때 자아정체성의 이해에 토대를 두고 내담자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다룰 수 있기를 기대하며 수행한 철학적 대화의 산물이다. 즉 이 책에서 제시하는 정체성 기반 철학상담 모델은, 자아정체성에 대한 물음 안에서 자신의 고민과 문제를 비춰보며 철학적 대화를 나눴던 상담 프랙티스에 토대를 두고 있다. 몇 년에 걸친 철학상담의 경험으로, 나는 다양한 치료법들이 의존하는 어떤 법칙이나 인간관을 전제하지 않고도 (개별적인 한 사람을 인격으로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철학적 사고와 질문으로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그들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고 통찰을 얻고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철학적 대화로서의 철학상담을 기존 치료의 보완이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한다.

▲ 천경자가 그린「孤」(1974). 화가는 늘 외로움을 품고 살았다고 말했다. 이 외로움이 작품 속에 깊게 스며들어 있다. 그림 속 여인의 짙은 피부색보다 그녀의 어떤 눈길, 허망함이 깃든 것처럼 보이는 눈빛이 어쩌면 작가의 본래적‘외로움’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나는 자아정체성에 기초한 철학상담 방법을 제안했다. 나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본질주의 모델이 아니라, 욕구와 믿음과 가치들이 거미줄처럼 중심과 주변에 위치하면서 서로 연결돼 있는 정체성 모델을 연구해왔다. 이 모델에 의하면 자아정체성의 탐구는 자신의 성품체계의 중심을 이루는 욕구와 믿음과 가치들이 무엇이며, 그것들은 일관적인지 그것들 사이에 갈등이나 모순을 없는지, 혹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치와 신념체계의 숨은 전제가 있는지 등을 검토한다. 내담자의 자기정체성 탐색은 주어진 문제를 한층 근원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며, 그 문제를 자신의 방식으로 다루거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내담자의 문제가 자아정체성의 성품체계 안에서 특정 위치를 갖는 방식으로 재기술 될 경우, 내담자의 성품체계 중심에 놓인 어떤 신념이나 가치가 자신을 억압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지, 서로 충돌하거나 불행으로 이끄는지, 그리고 그것은 수정 가능한 것인지 등을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아정체성의 탐구와 그로부터 나오는 가치관과 신념체계에 대한 반성적 검토는 내담자의 자기성찰과 이해를 촉구하고 자신의 문제해결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참여하도록 해준다. 나아가 자아정체성의 탐색은 개인적 측면만이 아니라 정체성의 정치학을 통해 사회구조와 문화가치를 반영하거나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그리하여 가부장제 문화가치를 반영하는 정체성 기반 철학상담은 여성주의 철학상담의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

방법론과 실천사례 균형있게 제시

이 책의 특징이자 기여 중의 하나는 철학상담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방법론과 실천사례를 균형 있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나는 이 책에서 학문으로서의 방법론과 실천으로서의 프랙티스 두 가지가 분리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돼 기능하는 철학실천의 수행을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철학상담의 사례들을 통해 철학상담의 전체과정에서 어떤 철학적 대화와 작업들이 이뤄지는지 살펴봄으로써, 구체적으로 철학상담이 어떤 활동이며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선희 이화여대 초빙교수·철학

필자는 서강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된 연구분야는 심리철학, 과학기술철학, 철학상담이다.『자아와 행위』,『사이버시대의 인격과 몸』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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