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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이탈되는 지금-여기 번역하는 사유들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이탈되는 지금-여기 번역하는 사유들
  • 교수신문
  • 승인 2015.03.3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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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번역하는 문장들』 조재룡 지음|문학과지성사|499쪽|21,000원

번역에 관한 글은, 번역 행위에 대한 이론적·철학적 규명보다는 번역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옹호와 문화적 파장에 대한 분석, 언어 내부의 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고자 할 때, 한번쯤 시도해볼 만한 사유의 반열에 오를 자격을 갖춘다. 그동안 우리는 번역에 대해, 철학적 접근에서 해석학적 분석에 이르기까지, 소통에 대한 염려에서 온갖 종류의 그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구절절한 사연의 호소와 주장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자주 공설들을 듣고 또 감내해야만 했다. 번역을 두 가지 항 안에 쑤셔 넣으려는 이분법의 이데올로기는 번역과 번역가를 돌보는 대신, 지속적으로 번역과 번역가를 괴롭히고, 번역 행위를 단순화시키며, 번역을 선택적 결과물로 만들어버리는, 너무나도 공고한 통념이자 순진한 입장이며, 번역의 문학적 활동과 그 가치를 즉각 취하하는 폭군일 수밖에 없다.


번역의 방법론은 다섯 가지, 열 가지를 말하지 않는다. 텍스트의 성격에 따라 가변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오로지 두 가지, 그러니까 직역이나 의역, 의미 중심이거나 환원되는 속성에 뿌리를 둔 이분법이 여전히 자기의 입장을 관철시키려는 것이다. 번역에서 파생된 모든 이분법의 진원지가, 그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 둘 중 하나에 치중하거나 치중할 수밖에 없다고 번역 이론가들이 입을 모으기 시작하면, 이분법은 번역의 방법론으로 상정해볼 최후의 보루라 자처할 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에 대한 포괄적인 사유에 관해서조차 기어이 둘로 나눠 구분하는 기이한 일에 온 정신을 쏟아붓기 시작한다. 저자 중심이나 독자 중심, 이국화 전략이나 자국화의 그것처럼, 증식하는 이분법은 사유의 방식과 문화의 가능성, 그것의 이해 양상이 바로 그렇게 이분법 속에서만, 바로 그 테두리 안에서만 결정될 수 있다고 믿는, 그럼에도 별다른 의심도 없는, 어떤 때는 신념이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순진하면서도 영악한 관점들이 돼, 다시, 여전히, 번역 주위로 유령이 돼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이분법의 악순환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번역하는 문장들, 지금-여기서 번역하는 사유들, 번역하는 저 문자의 세계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코드의 전환으로 취급되거나 절름발이 지지자의 망령이 되고 반쪽짜리 운명이 돼, 이 세계와 이 세계를 기습하듯 찾아온 사유들, 그 사유를 담아내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언어적 실험과 도전의 세계 저 바깥에서 겉돌고 헛돌면서, 우리에게서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이탈될 뿐이다. 이분법에 젖어 번역에 싸구려 해석의 격자를 씌운 이데올로그들, 이 번역 이데올로그들의 욕망이 번역을 지배하려고 드는 순간은 바로 이때다.
번역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출몰했던 이분법적 개념들을 한 번 떠올려보라. 번역이 당신을 호명할 때, 번역이라는 언어활동이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단순해서 가지런한 이 이분법의 두 곳 중 하나의 편에 서서 번역이 열어놓은 이 세계와 대면한다고, 그렇게 번역하는 문장들을 향유한다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직역―의역, 형식―의미, 문자―정신, 구조―내용, 원문 중심―역문 중심, 문학성―가독성, 충실성―창조성, 보존―변형, 딱딱한 번역―유려한 번역, 이국화―자국화, 출발어―도착어, 들이대기―길들이기, 이타성―정체성, 낯섦―친숙함 중에서 하나를 배척해 선택하거나 선택해 배척할 수 있다고 당신은 말할 수 있는가?

■ 저자 조재룡 고려대 교수(불어불문학과)는 먼저 출간한 『번역의 유령들』에 이어 『번역하는 문장들』을 내놓으면서, 다시금 번역을 하나의 고유한 ‘독창적 글쓰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유령’과 ‘문장들’의 접점에 그의 어떤 번역 정신이 노출되는 듯하다. 원문에 문단 구분이 없었지만, 편집을 위해 일부 문단 구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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