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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사조가 제국 담론 풍미에 기여
민족과 ‘민족공동체’ ‘민족의식’ 구분해야”
“신자유주의 사조가 제국 담론 풍미에 기여
민족과 ‘민족공동체’ ‘민족의식’ 구분해야”
  • 교수신문
  • 승인 2016.04.2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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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 3 윤리_7강_ 이삼성 한림대 교수의 ‘제국, 국가, 민족’

 ‘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 강연의 두 번째 섹션 ‘정치의 목표와 전략’ 둘째 차례는 이삼성 한림대 교수(정치행정학과)의 ‘제국, 국가, 민족’이었다. 지난 16일(토) 진행된 강연에서 이 교수는 최근 ‘제국’ 담론의 풍미가 국가와 민족의 개념에 대한 논의와 일정한 관련을 맺고 전개돼 왔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논의를 진행했다. 물론 그의 지적 관심의 연장선에 있는 탐색이라 그의 강연은 풍부하고 구체적이었다.
정치학자인 그가 보기에 이 ‘제국’ 긍정의 담론은 초국성을 지닌 다른 세계사적 흐름과 사조들과 긴밀히 연관된 것이며, 특히 신자유주의 사조는 제국 담론의 풍미에 기여한 일등 공신이다. 이것은 민족 개념에 대한 한국사회의 담론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여기서 이 교수는 흥미로운 지적을 제시했다. 그는 “많은 지식인들이 ‘민족’ 개념 자체의 언급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한 과잉한 개념적 부정의 담론이 문제”라고 비판하면서 “민족 개념을 논하는 데서 유의해야 할 것으로 적어도 동아시아에서 ‘민족’ 개념은 특정 인구집단의 집단적 자기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객관적 공통분모들이어서 ‘민족,’ ‘민족공동체,’ 그리고 ‘민족의식’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과연 그는 이 ‘민족’ 개념과 관련된 제국 담론을 어떤 식으로 읽어냈을까.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지구촌 유포리아와 민주적 세계화 비전의 浮沈
1990년대의 시작과 함께 본격화된 탈냉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4반세기의 기간에 새로운 세계질서의 모습을 표상하거나 해석하기 위해서 많은 개념들이 풍미하게 됐다. 탈냉전 초기 세계를 휩쓴 개념들 중에는 단연 ‘세계화’와 ‘지구촌’이 압도했다. 세계는 바야흐로 헌팅턴이 ‘제3의 물결’이라고 칭한 국내 정치체제들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미래의 세계질서에 대해서도 또한 ‘민주적 세계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유엔이 앞장선 코스모폴리스(cosmopolis)의 형성에 대한 인류의 유포리아(euphoria)가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포리아가 꺼지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치 않았다. 새로운 코스모폴리스의 민주적 지휘자로 기대를 모았던 유엔은 여전히 강한 국가들의 볼모로 남은 채 그들의 이해관계에 묶인 탓으로 새로운 폭력적 사태들을 해결하는 데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1990년대 인류는 코스모폴리스에 대한 기대와 좌절, 그리고 아나키 상태에 대한 공포라는 두 가지 극단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코스모폴리스는 ‘위계 없는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아나키는 ‘위계도 질서도 없는 혼란’일 것이다. 코스모폴리스의 비전이 붕괴하고 아나키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사람들이 망연해할 때, 그 틈을 타서 담론의 중심에 떠오른 ‘제국’은 ‘위계를 내포한 질서’를 표상한다. ‘위계를 내포한 질서’는 세계의 다양한 사회들 사이에 중심과 주변, 지배와 종속, 문명과 야만의 차별화가 다양한 방식으로 교직돼 있는 세계질서를 의미했다. 이렇게 해서 이념의 좌우를 불문하고 세계의 지적 사조에서 존재감이 뚜렷해진 ‘제국’ 개념은 대개의 경우 제국의 질서를 역사적 필연으로 내세우는 경향을 보였다.
제국은 기본적으로 광역성과 팽창성을 내포하는 질서표상의 개념인데, 그 광역성과 팽창성의 전제는 초국성(transnationality)과 다민족적 지배(multinational domination)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20세기 말부터 본격 풍미하게 된 제국 담론은 초국성을 띤 다른 세계사적 흐름들 및 사조들과 긴밀히 연관돼 있었다. 무엇보다 공산권의 붕괴 및 세계화와 함께 강력해진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사조는 정치경제론적 차원에서 제국 담론의 풍미에 기여한 일등 공신이었다.

그러나 제국 개념의 풍미는 국가, 그리고 많은 경우 그 국가 구성의 인적 요소를 가리키는 ‘민족’ 개념과 긴장관계를 내포했다. 제국 담론이 풍성하고, 신자유주의를 포함한 초국주의가 지배하는 지적 풍토에서는 국가는 억압과 폭력의 주체로서 인식되고, 민족은 실체가 없는 유령으로 치부됐다. 반면에 제국은 포용과 관용의 질서를 표상하는 것으로 제시되는 경향을 띠게 됐다. 유엔 등을 앞세운 ‘민주적 코스모폴리스’에 대한 희망은 비현실적인 유토피아로 치부되고 배제됐다. 이런 지적 조건에서 ‘제국’이 국가폭력과 인종청소가 난무하는 아나키를 대체할 실현 가능한 질서와 문명의 담지자로 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없었다.

제국 복권에 경쟁적으로 기여한 좌·우파 담론
제국의 도덕적 복권과 귀환은 세계 지식인 사회의 좌우 양측에서 경쟁적으로 진행됐다. 우파 담론에서는 신보수주의가 주도했다. 한편 좌파의 제국 담론도 ‘제국’의 도덕적 복권에 그 나름의 방식으로 중대한 기여를 했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제국』이 서방 좌파 지식계의 제국 복권을 표상했다면, 동아시아에서 그 같은 역할은 중국의 이른바 신좌파 지성의 대표라 할 왕후이(汪暉), 그리고 오늘날 일본의 진보적 지성의 대표적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저작들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주로 과거 제국의 중심부에 속했던 사회의 지식인들이 좌우를 막론하고 제국 개념의 복권에 나서고 있는 이 때, 필자는 제국 개념의 적절한 용법에 관해 이런 생각을 해본다.

제국 개념은 누구도 근본적인 이의가 없을 시대의 제국 현상을 가리키는 데 한정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주권국가 체제가 전 지구적으로 정착한 탈식민 시대 이전의 전통시대 및 근대 제국주의 시대에 쓰인 ‘제국’ 개념은 공식적 위계를 전제한 중심과 주변의 질서가 구축된 시대에 그 질서의 중심부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였다. 그런 개념적 용도로 이 개념을 돌려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전 지구적인 세계질서를 ‘하나의 제국’이라 간주하고 그것으로 설명하기에도 설득력이 의문시되는 한정 없는 현학적 논의가 필요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공식적 위계를 수반한 제국주의 질서 이외의 세계 및 국가관계를 설명하는 작업에 제국 개념을 남용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제국 담론 풍미와 맞물린 ‘민족’ 담론
제국 담론의 풍미는 국가에 대한 시각의 편식과 함께 민족 개념에 대한 우리 사회에서의 담론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민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에 대해서 1990년대 이래 우리 지식인 사회에 유력하게 존재하는 시각은 우선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민족주의적 관점이다. 민족을 인간들의 일차적인 운명공동체적 정체성 단위로 상정하는 태도다. 인간의 정체성은 다층적이고 다중적이지만, 민족주의는 민족이라는 정체성 단위에 특권적 위치를 부여하고 거기에 정신적 권위를 부여한다. 다른 정체성 단위들, 즉 사회적 계급, 젠더, 종교, 초국적 연대 등의 차원들이 인간 정체성에서 갖는 중요성은 배제되거나 주변화 된다. 둘째는 그와 정반대되는 것으로, 민족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다. 또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시각을 주로 인용하면서 ‘민족’이라는 정체성 단위를 ‘상상의 공동체’라는 식으로 일축하는 논의들이다.
위의 두 시각은 민족 정체성 담론에서 유력한 두 가지 시각으로 앤서니 스미스가 비판 대상으로 삼은 것들이기도 하다. 하나는 ‘원시주의(primordialism)’이다. 민족의 실체가 고대에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아득히 먼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인식이다. 다른 하나는 스미스가 ‘근대주의’ 또는 ‘도구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에너스트 겔너와 베네딕트 앤더슨을 포함한 많은 서양 지식인들이 제3세계의 탈식민 사회들을 인식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경우 1990년대 이래 식민지 근대화론은 이영훈 교수의 논쟁적 주장에서 잘 나타나듯이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론, 그리고 일본에서 유행한 “민족은 없다” 식의 논리를 근거로 ‘민족’ 개념 부정을 주도해왔다. 1999년에 출간된 저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에서 임지현 교수는 그가 한국 사학계의 지배적인 형태라고 파악한 민족 담론 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다. 그러나 임지현의 논지는 이영훈 등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민족 개념 비판과는 구분돼야 한다. 임지현은 ‘민족’에 대한 개념적 부정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민족주의’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비판하는 민족주의는 “시민적 공공성이 사상된 채 민중의 원초적 감정에 호소하는 동원 이데올로기” 형태의 민족주의였다.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2000년대에 들어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비대해진 ‘민족 담론 비판’은 임지현 식의 온건론을 넘어서 이영훈이 제기한 것과 같은 ‘민족’ 개념에 대한 인식론적, 존재론적 부정으로까지 비약한 형태의 것이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민족’이란 개념 자체의 사용 혹은 언급 자체를 터부시하는 경향까지 생겨난 것은 그러한 과잉한 개념적 부정의 담론이 광범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말해준다. 필자가 이 글에서 문제로 삼는 것은 그와 같은 개념적 부정의 논리다.

민족 개념을 논하는 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민족,’ ‘민족공동체,’ 그리고 ‘민족의식’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동아시아에서 ‘민족’ 개념은 특정 인구집단의 집단적 자기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객관적 공통분모들, ‘시간적 깊이를 가진 공간적 구조’(그로스비)로서의 영토에 대한 소속감을 포함한 다분히 객관적인 요소들이 충분조건이다. 이에 비해서 ‘민족의식’은 그러한 객관적 공유를 바탕으로 형성된 일정한 집단적 운명공동체 의식을 가리킨다. ‘민족공동체’는 그러한 민족의식을 전제한다. 근대적인 민족의식 내지 민족공동체는 물론 근대의 산물이라고 함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민족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근대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민족을 민족의식과 등치시키는 데서 비롯되는 오류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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