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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시게, 유신시대의 특권들이여!”
“잘 가시게, 유신시대의 특권들이여!”
  • 육영수 중앙대 교수·서양사
  • 승인 2016.12.26 10:1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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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舟民水’, 이래서 추천했다
기이한 인연이다. 필자는 박근혜 정권 출범 첫 해 연말에 ‘倒行逆施(잘못된 길을 고집하거나 시대착오적으로 나쁜 일을 꾀한다.)’라는 사자성어를 추천해 2013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됐다. 새 정부의 초반 행보가 “유신체제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려는 억압적인 국가권력과 심화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동반”했음을 지적하려는 의도였다.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해가 저무는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2014년에는 그 해 사자성어 ‘指鹿爲馬’가 증언하듯 사슴을 말(!)이라고 억지 부리듯이 많은 거짓과 궤변이 진실로 위장돼 국민들을 속였다.
 
2015년은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 때문에 나라 상황이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온통 어지러웠던 ‘昏庸無道’의 한 해였다. 그리고 마침내 2016년에는 분노한 국민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재확인하며 박근혜 선장이 지휘하는 배를 흔들고 침몰시키려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교수들이 책상머리에서 책만 읽거나 자기 잇속만 챙기는 줄 알았는데, 거리로 나서 현실정치를 비판하는 사자성어를 찾으며 세상걱정도 함께 했구나.
 
과반수 이상의 국민투표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왜 탄핵위기에 몰려 국민에게 ‘배반당한’―혹은 국민의 기대와 믿음을 배반한―지도자가 됐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비상식적이며 봉건적인 국가운영으로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적 업적과 유산을 욕되게 한 불효녀인가. 박근혜 정권의 행로와 그 결말은 유신정권의 역사적 성격과 한계를 계승하려는 욕심의 필연적인 산물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흔히 유신정권은 빠른 근대화와 경제성장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에는 부정적이었다는 이중적인 평가를 받는다. 분단시대의 멍에를 안고 ‘싸우면서 건설’하는 역사적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노동의 권리와 표현·집회결사의 자유는 희생되거나 보류될 수도 있다는 ‘나쁜’ 역사관을 국민들에게 강요한 것이 박정희 정권이 남긴 치명적인 역사유산이다.
 
“밥이냐 인권이냐” 중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했던 유신정권의 협박이 잉태한 것은 박근혜 정권의 맨 얼굴이다. 다시 말하면, 격세유전으로 나타난 부녀정권은 민주주의 없는 경제성장은 천박한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하고, 헌법이 보장하는 인권·자유평등이 일상적으로 실현되지 않는 국가는 위험한 독재주의로 타락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는 관점에서 공동운명체인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군주가 배라면 백성은 물이다.”라는 사자성어도 시대착오적인 개념이다. 유가사상에 입각한 전국시대의 지식인(순자)이 지배자에게 민본주의를 훈수하는 帝王學에서 파생됐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의 세상에는 더 이상 무조건 존경받아야 하는 군주도 없고 ‘그 자리에 그냥 가만히 있는’ 착하고도 슬픈 백성도 없다. 그러므로 ‘君舟民水’라는 낡은 사자성어는 현대적으로 새롭게 번역돼야 마땅하다.
 
나라의 주인은 세금도둑 공범인 부패한 공주·고위공직자·환관·시녀가 아니라 시민 모두이며, 회사의 주인은 재벌이 아니라 노동자이며, 중고등학교·대학의 주인은 기업·사립재단이 아니라 학생들이다. 우리가 직면한 현 사태의 어려움과 딜레마는 이런 주체적인 주인의식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소망하는 사회변화를 실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역사’는 우리를 ‘위하거나’ 대신해서 투쟁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일제식민시대 이후 지금까지 살아남은 많은 권력가들(과 그 후손들)은 겉으로는 공익과 사회정의를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자기이익을 시시콜콜 따지는 비겁하고 파렴치한 좀생이들이었다. “정의롭고 강직했던 인재가 아니라 야비하고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이 살아남아 출세했다”는 부끄러운 명제야말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다. 이런 현실감각과 역사적 사실로부터 도피해 추상적인 ‘역사심판’에 문제해결을 기대하거나 맡길 수는 없다.
 
역사를 변화시키고 전진시키는 첫 발은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촛불을 나눠 밝히려는 너와 나의 용기와 권리선언으로부터 시작된다. 좌절당한 혁명, 늘 지연되는 인권, 지불되지 않는 임금, 애도되지 않은 역사의 희생자들, 승자들이 은폐·삭제한 약자들의 억울한 목소리―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각자가 고유한 방식과 수단으로 경계하고 저항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선장이 더 이상 필요 없는 배의 사공이 되어 자유평등·민주공화국의 돛을 올리고 다른 미래를 향해 힘차고 집요하게 노를 저어야 한다. 영치기, 영차. 어기야, 영차.
 
기구한 인연이로다. 국가가 구출하지 못했던 세월호의 영령들과 함께 이 나라 대통령이 갈팡질팡 운항했던 배도 바다 밑으로 사라지려고 하는구나. 잘 가시게, 유신시대에서 상속된 특권의 금수저들이여. 안녕, 국정교과서에 감금된 우리 청년들의 역사관이여. 아듀, 아름답지 못했던 병신년이여…….
 
 
육영수 중앙대 교수·서양사
미국 워싱턴대(시애틀)에서 서양근대현대지성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중앙대 역사학과·대학원 협동과정 문화연구학과·독일유럽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는 「트랜스내셔널 지성사 다시 쓰기: 식민지 시기 ‘한국적 니체’의 생애 연구, 1920~1945」, 「베를린장벽 역사기념물 만들기」, 「‘식민지 계몽주의’에 관한 트랜스내셔널 시각과 비평: 근대의 자원병 혹은 징집병」 등이 있다. 저서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 프랑스혁명의 문화사』와 『책과 독서의 문화사: 활자인간의 탄생과 근대의 재발견』, 편역서 『치유의 역사학으로: 라카프라의 정신분석학적 역사학』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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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2016-12-31 08:59:22
“밥이냐 인권이냐” 중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했던 유신정권의 협박이 잉태한 것은 박근혜 정권의 맨 얼굴이다.??? 당시 어려서 뭘모르는분이 정의가 어쩌고 하는데 그때 봉지에 담긴 쌀과 새끼줄에 달린 연탄을 보기나 한겁니까?박정희와 박근혜는 다른 역사를 만든 다른 인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