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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잡음 자체가 미래적 희망"
"바로잡음 자체가 미래적 희망"
  •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 승인 2017.12.17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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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破邪顯正’을 추천했나?

교수신문사로부터 2017년의 사자성어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이 왔을 때 필자는 망설임 없이 파사현정(破邪顯正)’을 말했다. 뒤에 알았지만, ‘파사현정은 이미 <교수신문>이 선정한, ‘2012년 임진년 새해 희망을 담은 사자성어였었다. 우연의 일치였으나, 이 성어가 올해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니 좀 씁쓸했다.

파사현정이란 중국 吉藏이 지은 삼론현의에 나오는 용어다. 간단히 말하면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냄의 뜻이다. 원래 불교 용어였지만 이제 그 울타리를 넘어 사회일반의 통용어로 자리 잡았다.

필자가 파사현정’을 2017년의 사자성어로 추천한 이유는 간단하다. 한 해 동안 세상을 움직였던 적폐청산이란 이슈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사회는 얼마나 썩어문드러져 있었던가. 사회 지도층, 엘리트집단, 기득권층의 갑질과 독점의 민낯이 서서히 까발려지자 모두들 경악했고, 또한 속이 후련했다. 그 패거리들이 장악했던 정치, 경제, 교육, , 역사, 제도, 문화, 도덕에 대한 기획과 실천들. 그들은 폼 나게 케이크를 자르고, 또 자른 것을 멋대로 취하고, 그 여분을 끼리끼리 몰아주었다. 그런 배분의 방법과 룰과 도덕성, 심지어 그 해석까지 독점해왔다. 광신적 宗派들의 폐쇄구역 내에서만 룰과 매뉴얼이 살아있었고, 그 바깥에서는 세월호처럼 엉망진창으로 사회가 침몰하고 있었다. 그릇된 것()’을 깨끗이 깨부수고(), ‘바른 것()’드러낸다()’는 것, 저 적폐청산의 슬로건은 필연적 귀결이었다. 사회 곳곳의 곪고 썩어 문드러진 환부를 시원히 도려낼 힘과 용기는 시민들이 쥔 촛불에서 나왔다. 한 외국인은 시민들의 촛불 물결을 보고 동학 농민혁명의 횃불재현이라 평가했다.

파사현정은 두 가지 논리로 읽을 수 있다. 먼저, ‘파사현정’, ‘破邪與顯正이다. 다음은, ‘파사자체가 곧 현정’, ‘破邪卽顯正이라는 것이다. 사실 三論玄義의 논의 구조에서는 파사와 현정이 二門으로 구분된다. 이후 파사자체가 곧 현정’, ‘파사즉현정이라는 식의 해석이 정착했다. 이런 불교적 맥락을 넘어, 우리의 현실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다 살려 읽을 수 있다.

예컨대 파사적폐청산으로, ‘현정바른 정치의 실현으로 본다면, ‘파사여현정쪽은 적폐청산바른 정치의 실현이 따로따로라는 생각이다. 이어서 파사즉현정쪽은 적폐청산자체가 바로 바른 정치의 실현이라는 생각이다. 현재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적폐청산은 후자처럼 보인다. 적폐청산이 현 정권의 통치철학과 그 실천 속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 아마 파사즉현정파사여현정으로 가닥을 잡아가리라 본다.

적폐청산은 우리 사회의 과거와 관련된다. 과거는 과거가 아니고 바로 현재, 미래로 연결돼 있지 않은가. 과거 실컷 누려왔던 자들은 아프고 쓰라리겠지만, 당해왔던 자들에게는 적폐청산의 바로잡음()’ 자체가 미래적 희망이다. 누군가의 눈물이 누군가에게는 웃음이었고, 누군가의 웃음이 누군가에는 눈물이었던 끔찍한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르상티망을 풀어내고(解寃), 相生을 도모해야 함은 적폐청산 이후, 다시 이것이 적폐였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다. 파사현정은 어느 한 쪽의 사자성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당면한 과제이다. 그래서 이제 파사현정의 판단을 다시 판단해보는 공정한 제 3자의 시선확보에 논의를 좀 더 집중해 갈 필요가 있다. 과연 파사현정의 자격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 칼잡이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시민 여론을 등에 업은 포퓰리즘인가. 아니면 지성과 도덕에 근거한 통치철학인가. 이런 메타적 시야를 확보하면서, 적폐청산의 공정성이 사회전체의 상생적 맥락을 살려내기를 기대한다.

 

최재목 영남대·철학과

일본 쓰꾸바대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강화의 지성 하곡 정제두의 양명학, 상상의 불교학등이 있다. 네덜란드 레이던대 연구교수, 미국 하버드대 연구교수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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