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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서의 역사
삶으로서의 역사
  • 이영석 광주대 서양사
  • 승인 2018.02.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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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事

나는 1년 후 퇴직을 앞두고 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나 서양사를 연구하는 동업자들의 세계에서 교수또는 선생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호칭을 넘어서 연구 분야와 관련된 것으로는 역사학자, 더 좁은 의미로는 서양사학자라는 표현이 있다. 대학을 떠난 후에는 그냥 역사가로 불렸으면 좋겠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세대 이상 영국사를 공부하면서 수많은 논문들을 발표하고 여러 저서를 펴냈다. 그러면서도 도대체 내가 해온 작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깊이 고민한 적은 별로 없다. 2016년 연말부터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가끔 떠오르는 단상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삶의 경험과 역사 탐구의 과정을 연결해 좀 더 자유로운 형식의 짧은 글들을 썼다. 나와 같은 세대에 속하는 몇몇 분들이 글을 읽고 코멘트와 댓글을 달아주셨다. 이를 참조해 기억 속의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고 또 수정하기도 했다. 그 글들을 모아 작년 연말에 삶으로서의 역사라는 책을 냈다.

1953년생인 나는 궁벽한 산촌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유년 속의 생활세계는 전근대적인 풍경으로 남아 있다. 언젠가 사석에서 농담 삼아 스스로 전근대, 근대, 탈근대를 가로지르며 살아왔노라고 말한 적이 있다. 더욱이 한국사회 자체가 산업화와 민주화의 진행과정에서 반세기 이상 심각한 혼란과 갈등을 겪었다. 나는 그 혼란의 와중에서 영국 근대사 연구를 계속했다. 1980년대 학문적 관심을 끈 주제는 영국 산업화였다. 그 당시 나는 한국 사회 변동의 핵심이 산업화이고 영국 산업혁명 연구가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다.

학위논문에서 산업혁명기의 공장법을 다뤘는데, 기대만큼 좋은 논문을 내놓지 못했다. 그 점이 오랫동안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나는 몇 년간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지루한 작업을 계속했다. 영국에서 원사료를 수합하고 또 사회통계의 방법을 원용해 좀 더 나은 수준의 원고로 다듬어산업혁명과 노동정책(1994)을 출간했다. 아마 이때부터 사회사 연구에 재미를 붙였고 또 자신감도 생겼던 것 같다. 그 후 내 학문 여정은 19세기 후반 영국 경제 쇠퇴, 19세기 영국 노동사, 런던과 상인층에 관한 연구 등으로 이어졌다.

진보적 시각에서 경제사 또는 사회사 연구에 집착했던 나는 1998년에 리처드 에번스의 역사학을 위한 변론을 번역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충격을 받았다. 역사의 인과관계를 밝힐 수 있고 객관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 자체가 흔들리고 상대주의 역사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나는 역사변화의 인과관계를 쫓는 작업보다는 한 시대의 단면을 드러내 미시적으로 재현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이런 방법을 스스로 사회적 풍경으로서의 역사라 이름 붙이고 수년간 작업을 계속한 끝에 19세기말 영국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재현한 영국, 제국의 초상(2009)을 내놓았다. 한 시대의 단면을 재현한다는 원대한 이상은 실현하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펴낸 10여 권의 연구서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이다. 책이 거둔 성과와 관계없이 그만큼 탐구에 열정을 바쳤기 때문이다.

2010년대에 들어와 나는 연구논문들을 수정 보완해 책을 내는 방식에서 벗어나 한 주제를 오래 탐색한 다음 전체 원고를 쓰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 결과물이 18-20세기 공장제도의 변천을 다룬 공장의 역사(2012)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을 다룬 지식인과 사회(2014). 지금은 20세기 영제국의 해체과정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1983년 처음 <역사학보>에 공장법 관련 논문을 발표한 시점부터 따지면 올해로 35년간 영국 근대사에 파묻혀 지낸 셈이다. 그동안 연구 주제는 바뀌었지만, 그 여정을 관통하는 주제는 근대성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한 세대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서양근대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옛날에 유럽 근대사 연구는 계몽적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유럽은 단지 유럽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사 연구는 어떻게 그 존립근거를 새롭게 마련할 것인가. 결국, 지구사적 시각에서 근대 유럽을 재구성하고 유럽세계와 다른 세계의 관계를 통해 근현대를 해석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앞으로 몇 년간 탐구를 계속할지 모르지만, 바로 이런 방향으로 글 쓰는 일을 한동안 계속하려고 한다.

 

 

이영석 광주대·서양사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사회사의 유혹, 공장의 역사:, 지식인과 사회: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역사등 다수가 있다. 19세기 영국 사회사 및 노동사 분야를 오래 연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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