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20:25 (목)
[學而思] 기술을 통해 본 역사
[學而思] 기술을 통해 본 역사
  • 최형섭 서울과기대·기초교육학부
  • 승인 2018.02.26 10: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형섭 서울과기대·기초교육학부

‘기술사’라는 학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공과대학 3학년 무렵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약 십 년 전에 서울대학교에는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이 설립되어 과학자의 꿈에서 깨어난 자연과학도들 사이에서 꽤 인기를 끌고 있었다. 공과대학 출신의 몇몇 선배들이 이 과정으로 진학해 기술의 역사를 탐구하고 있었다. 1995년 12월에 출간된 『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녹두)라는 책이 결정적이었다. 공과대학 출신으로 당시 과학사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선배, 송성수 부산대 교수(물리교육학과) 편집·번역한 책이었다. 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던 공대생들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유학 생활을 하게 된 미국에서도 기술사는 비교적 젊은 학문이었다. 그 시작은 원로 엔지니어들이 기계장치들의 변화를 탐구했던 것에서 시작해, 1990년대 이후부터는 과학사·과학사회학의 영향을 받아 사회구성주의를 받아들인 학자들이 새로운 기술사를 개척하고 있었다. 기술적 인공물과 사회 구조의 상호작용을 근간에 깔고 있는 새로운 기술사의 성과들은 원자력 발전, 인공위성, 컴퓨터 통신 체계, 전력망 등 20세기 기술의 급속한 변화를 성공적으로 설명해 냈다. 나 역시 이에 편승하여 반도체 기술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이전되는 과정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기술은 인간 활동의 한 측면이다. 이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기술의 역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역사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의 일부가 된다. 정치사, 사상사, 외교사가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을 이루는 조각보들이라면 기술의 역사 또한 중요한 한 조각이다. 특히 20세기 이후 인류사에서 기술은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 대학에서 기술사, 보다 넓게는 과학기술사는 여전히 확고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기존 사학과의 벽은 여전히 두텁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제도의 장벽은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심각하다. 미국이나 유럽의 사학과에서는 과학기술사 전공자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한국에서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다.

한국의 제도적 장벽은 뿌리 깊은 문·이과 구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과학기술사학자들은 이공계 전공자들이 보기에 ‘문과’이고,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들에게는 ‘이과’로 여겨진다. 실제로 내가 속해 있는 한국과학사학회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와 전국역사학대회협의회에 동시에 참여하는 유일한 학회이다. 이러한 중간자적 속성이 유리할 때도 있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리한 경우도 많다. 특히 학문후속세대 양성이라는 면에서 보면 안정적인 재생산을 해내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인문학에서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교사 전공자가 외교관이 아닌 것처럼, 학문의 정체성은 그 대상이 아니라 방법론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2011년에 귀국한 이후 나는 나름대로 과학기술사와 인문·사회과학 사이의 벽을 넘기 위한 활동을 해 왔다. 되도록이면 연구 결과를 〈한국과학사학회지〉가 아니라 역사학 학술지에 싣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이를 위해서는 과학기술사의 주제들을 ‘일반’ 역사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방식으로 서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는 박정희 시대 연구자들이 모이는 ‘6070 연구반’에 참여해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테크놀로지 문제에 천착하는 인문학자들과 함께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알마, 2017)라는 책을 같이 쓰기도 했다. 개인적인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는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 내에서 과학기술 관련 주제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기술사 전공자로서 갖고 있는 꿈은 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한국현대사를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특히 해방 이후 한국사에서 기술은 한국인의 삶을 재편한 핵심적인 요소라고 믿기 때문이다.

 

 

 최형섭 서울과기대·기초교육학부

 서울대 금속공학과에서 학사학위를,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과학기술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  다. 현재 <한국과학사학회지> 부편집인과 과학잡지 <에피>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공저로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