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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탁금지법, 그리고 ‘선물’의 의미 
청탁금지법, 그리고 ‘선물’의 의미 
  • 이영란 숙명여대 명예교수·법학 
  • 승인 2018.03.0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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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이영란 숙명여대 명예교수·법학 

‘청탁금지법’의 정식명칭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다. 법안을 제출할 당시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의 이름을 따 ‘김영란법’이라고 불러왔는데, 법무부가 약칭으로 청탁금지법이라고 부르자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김영란법이라 부르고 있다. 그 여파가 나한테까지 미쳐 가끔 내 이름의 성을 바꿔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이 법은 단지 공직자와 관련된 금품수수를 규제하는 것인데도 실제로는 대다수 국민들의 뇌리에 박혀 일반의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고, 우리의 상식과 인식을 개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직자에게 금품을 제공하면서 부정청탁을 해 왔는가, 공직자들은 얼마나 많은 부정청탁을 받고 알게 모르게 불공정한 공무수행을 해왔는가, 공공기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얼마나 실추됐는가 등을 되돌아보면 이 법이 나오게 된 배경을 쉽게 알 수 있다. 의미가 변질된 떡값이나 상품권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선물의 탈을 쓴 뇌물이 죄의식 없이 통용됐었다. 

한 가지 이 법의 아쉬운 점은 이익충돌(conflict of interest) 방지조항이 없다는 것이다. 노른자 없는 계란, 팥소 없는 찐빵의 형국이다. 이 법이 당초 ‘벤츠 여검사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현직 여검사가 변호사로부터 사건청탁을 받고, 그 대가로 고급차의 상징인 벤츠와 여성들의 로망인 샤넬백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은 사건이다. 이를 뇌물로 보지 않고 내연관계의 선물로 보면서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내연관계이기도 하고 부정청탁관계이기도 하다면 벤츠와 샤넬백은 내연녀를 위한 선물과 부정청탁을 위한 금품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봐야하고, 수수자가 공직자라면 더더욱 뇌물죄로 처벌해야 하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드는 판결이었다.   

공직자윤리법에 이해충돌방지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선언적 의미가 크고 공직자 재산등록과 퇴임 후 취업제한 등에 한정돼 있고 징계 수위도 낮다.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할지는 아직 논의가 더 필요하겠지만 아무튼 ‘이익충돌’이라 함은 예컨대 직무상 비밀을 이용한 재산취득, 지위를 이용한 자녀의 취업과 같이 공직자가 자신이 맡은 업무의 공익과 사사로운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에 사익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막연히 공직자 스스로의 양심이나 윤리에 맡기기는 어렵기 때문에 이런 경우도 청탁금지법에 규정해서 엄히 처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어쨌거나 이 법 시행 이후에 한 끼에 10만원씩 하던 비싼 식당은 손님이 뚝 끊겼고, 명절선물은 한우정육세트가 과일상자로, 조기세트가 건어물세트로, 12마리 들어있던 옥돔세트는 4마리로 줄었다. 뇌물이 줄고 선물의 질과 양이 바뀌어 가던 즈음 농축수산업자들의 아우성에 못 이긴 농수산부가 앞장서 법 시행 1년 2개월 만에 결국 시행령의 일부를 개정했다. 직무관련성 없는 공직자에게 주는 농축수산물 선물의 상한을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상향조정했다. 농수산부의 고충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 법으로 인한 부작용이나 일시적 현상 때문에 시행령을 개정해 간다면 이 법의 취지와 정신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 

청탁금지법은 부정청탁을 받은 공직자를 직접 대상으로 하는 법이지만, 공직자에게 선물이나 금품을 주지 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차제에 선물의 의미와 개념이 확 바뀌었으면 좋겠다. 부정한 청탁을 하면서 반대급부를 바라고 고가의 금품을 제공하는 선물은 ‘선물’이 아니다. 형사실무자들에 의하면 이 법의 위반은 대체로 주변의 신고에 의해서 밝혀진다고 하며, 벌써 상당수의 위법행위자들이 처벌을 받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위반자들이 거의 다 나이가 많은 기성세대라고 한다. 기성세대가 부정부패로 윗물을 흐리고 젊은 세대를 상대로 갑질이나 하면서 걸핏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운운하며 아직도 자신들의 과거 생활습관이나 사고방식을 기준으로 판단해서 매사 맘에 안 들어 하고 변화된 세태를 비난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을 보면 시쳇말로 짠돌이, 짠순이가 많아 외려 과분한 선물을 할 생각도 부정한 청탁을 할 생각도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아마 청탁금지법이 없었더라도 이삼십년 쯤 후에는 저절로 공직사회가 상당히 깨끗해질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좀 더 앞당겨 공직사회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서 잠정적으로 이런 법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본다. 선진사회일수록 선물이 마음을 담은, 마음을 표현하는 소액의 작은 것들인데 우리 젊은이들의 행태도 그와 같아지는 것 같아 낙관하는 것이다.   

스펜서 존슨(Spencer Johnson)의 책, 『선물(The Present)』을 보면 단어가 갖는 ‘지금 이 순간’과 ‘선물’의 두 가지 의미를 사용해,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세상이 당신에게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라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를 깨달아 가면 좋을 것 같다. 선물은 선물일 뿐. 

이영란 숙명여대 명예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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