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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넘고 다양성 인정하는 '관점의 이동' 필요
여성 넘고 다양성 인정하는 '관점의 이동' 필요
  • 양도웅
  • 승인 2018.03.12 1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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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주관 제49회 과학기술여성리더스포럼_「시민사회와 성평등정치 그리고 과학기술」 개최

최근 ‘미투’ 운동으로 우리 사회에 경각심을 고취시키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문·사회·예술 분야에 속한 여성들이다. 하지만 그와 대척되는 지점에 있다고 간주되는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조용하지만 꾸준히, 여성들을 격려하고 지지해온 사람들이 존재한다. 2003년에 설립된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회장 유명희, 이하 여성과총)와 이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 과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전도유망했던 한 남성 정치인이 오랫동안 자신의 여성 보좌관을 성폭행해왔다는 폭로가 있던 다음날(7일) 아침 일찍, 여성과총이 주관하는 제49회 과학기술여성리더스포럼(이하 포럼)이 ‘시민사회와 성평등정치 그리고 과학기술’이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포럼이 끝난 뒤, 모든 참석자들이 '손가락 하트'를 그리고 있다. 사진 제공=여성과총
포럼이 끝난 뒤, 모든 참석자들이 '손가락 하트'를 그리고 있다. 사진 제공=여성과총

선녀의 관점과 선녀 부모님의 관점

포럼이 시작되자 홀 앞에 위치한 단상은 ‘표준이 주는 폭력’의 한 사례로 지목됐다. 환영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유명희 여성과총 회장은 “단상이 너무 높은데요. 여성 친화적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했고, 강연을 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정현백 여성가족부(이하 여가부) 장관 또한 “장관이 돼서 좋은 점은요. 단상에 발판을 만들어준다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정 장관보다 앞서 단상에 오른 오세정 국회의원(바른미래당)은 다른 두 여성과 달리 단상의 높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단상의 높이가 눈에 띄는 두 여성과 단상의 높이가 눈에 띄지 않는 한 명의 남성. 우리 사회의 사소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단상의 높이가 ‘남성’을 표준으로 하여 제작돼 있음을 알게 해주는 짧지만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표준을 만드는 것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하지만 표준이 특정한 요소, 이를테면 특정한 性만을 기준으로 구성된다면, 다른 성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 표준으로 인해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강연에서 정 장관은 자신의 독일 유학 경험을 소개하며 ‘유연한 표준’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독일 유학 시절, 그곳에서 학생들과 세미나를 할 때는 높낮이를 조정할 수 있는 탁자를 사용했어요.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았어요. 이 탁자의 높낮이를 조정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여성가족부의 몫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정 장관의 이 말은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제도와 문화들을 여성중심적인 제도와 문화들로 바꾸는 것이 여가부(혹은 여성주의)의 목표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여성주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말이기도 하며, 정 장관이 강연 내내 ‘성평등’을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 성평등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 장관은 ‘관점의 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정 장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을 예로 들었다. “우리는 대개 나무꾼에게 감정이입하여 나무꾼을 측은하게 여기는데, 선녀의 관점과 선녀의 부모의 관점에서 보면 나무꾼은 납치범이거나 성추행범입니다.” 그러나 정 장관은 하나의 관점에만 머무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성의 관점을 말하는 여성들의 목표가 어디까지나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여성의 생존률

정 장관의 강연이 끝난 후, 오명숙 여성과총 포럼 위원장을 좌장으로 한 ‘과학기술계의 성평등’이라는 주제로 패널토론이 진행됐다. 첫 번째로 입을 연 패널은 이건우 서울대 교수(기계항공공학부)였다. 

이 교수는, 우리 사회가 생산가능인구의 비율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인구절벽에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뒤 “제조업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사정을 고려하면 여성 과학기술 인력을 과감하게,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유일한 해결책에 가깝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잠재적으로 여성 과학기술 인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공과대학 여학생의 비율은 2005년 이후 대략 18% 수준에서 멈춰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공학계열로 진학하는 여학생의 수가 아쉽기는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현장에서 근무하는 여성의 비율이 낮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여성의 진학률이나 취업률보다 ‘사회에서의 생존률’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공학을 전공한 뒤 현장에서 근무하는 여성의 비율이 약 8.5%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최우선으로 해야 할 것은 현재 과학기술계에 종사하고 있는 여성들의 고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해결하는 것이다. 다양한 삶의 인정이라는 거시적인 목표를 설정한 정 장관이 강연 후반에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 그리고 경력 단절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언급한 이유도 이러한 현실 때문이다.

이어서 최근 불고 있는 미투 운동과 관련지어 이은정 과학전문기자는 “많은 여성 대학원생들이 대부분의 남성 지도교수 한 명에 의해 운영되는 폐쇄적인 실험실 문화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문제는 외부의 시선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일정 정도 해결 가능한데, 이 기자는 “여성과총과 같은 단체에서 성희롱 피해 여성 과학기술인을 위한 상담 및 지원제도 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여성과총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남녀 성비 1:1의 페미회로 사례 

사회에서 여성의 생존률을 높이고 남성중심의 폐쇄적인 대학원 문화나 직장 문화를 바꾸는 데 여성 혹은 여성단체의 힘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남성들의 참여와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여성들의 힘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길 때, 여성과 남성의 대립 구도는 공고해질 가능성이 크다. 

폭력적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쪽은 여성들의 힘만으로도 충분하며 사회 변혁은 폭력적인 저항 운동에 의해서도 달성 가능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번 포럼에서 논의된 것은 성평등과 다양성, 공존 등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토론 패널 중에 가장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는 강미량 페미회로 책임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석사과정)였다.

페미회로는 지난해 3월 과학기술특성화 대학(DGIST, GIST, POSTECH, UNIST, KAIST) 내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만든 단체이다. 포럼 참석자들의 이목을 끈 것은 ‘페미니스트=여성’이라는 고정관념과 달리 페미회로의 남녀 성비가 1:1이라는 점이다. 이 포럼에 참석한 남성 과학자들의 수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적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비율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이 교수 또한 “토론자로 선정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여성주의 운동에 남성들을 참여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방증하는 증언이었다.

청중으로 자리한 많은 선배 및 동료 과학자들은 페미회로의 남녀 성비에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강 책임자는 “남녀 비율을 1:1로 맞추는 것은 페미회로의 기본적인 목표였습니다”라고 말한 뒤, “남학생과 여학생의 공통의 이해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페미회로가 말하는 남녀 공통의 이해란 무엇일까. 남성중심주의 문화, 이를테면 상명하복의 문화나 폐쇄적인 시스템 등이 여성뿐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폭력적일 수 있음을 남녀 모두가 이해했다는 것이다. 

한편 페미회로의 활동을 경청하던 한 청중은 자신을 오랫동안 여성과총 행사에 참여해온 남성 과학자라고 소개한 뒤, “여성들의 문제를 여성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도 유의미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키기 위해서는 오늘 여러 참석자분들께서 말씀하신 다양성의 관점으로 확대하여 접근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여성 과학자들의 포럼이라고 해서 여성 과학자들의 문제만을 다루지 말고, 더 많은 사안들에 대해 논의해보자는 말이다. 이익단체 수준에서 벗어나 사회에서 담론을 선도하자는 제안인 셈이다.

포럼은 모든 참석자들이 ‘손가락 하트’를 만드는 것으로 성황리에 끝났다. 참여한 여성 과학자들과 남성 과학자들의 모습에서, 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참여를 기대하는 여유’를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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