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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과 교수 권력
미투 운동과 교수 권력
  • 조은영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18.03.19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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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조은영 편집기획위원/원광대·미술사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난 미투운동이 태풍이 되고 있다. 일련의 기억이 떠오른다. 워싱턴 DC의 장관 주최 만찬 석상에서 어느 하원의원이 동북아 관련 일로 연락하겠다기에, 국립기관 연구실 공용전화만 알려줬었다. 대화는 단둘이 해외여행 가자는 황당한 제안으로 이어졌고, 한국여성의 품위에 누가 될까 봐 성질 누르고 깍듯이 거절했건만 의도치 않게 내 몸값(?)만 점점 올라갔다.

이 코믹한 상황을 공론화했고, 남녀 동료들이 그의 전화를 막아줬다. 결국 논의 끝에 나는 명함에 적힌 집 전화로 연락했다. 그의 부인한테 왜 남편이 계속 전화하는지 물었고, 그 일은 종료되었다. 상처는 누가 주고자 해도 내가 받지 않으면 상처가 될 수 없다던가. 그는 내게 상처나, 정치 권력, 돈 권력, 백인 권력, 남성 권력이 되지 못했다. 강압이 통용되지 않은 다른 세상 이야기다.

내 잘난 탓이 아니라, 권력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게 해준 주변 요인들이 있었다. 전에 살던 주에서 멋진 골든래트리버의 동행이라서 매번 반가웠던 친절한 아저씨가 상원의원임을 알기까지 1~2년이 걸린 사회 분위기가 한몫했다. 낡은 트럭을 모는 동네 할아버지가 그 지역 병원, 학교, 미술관, 도서관을 세운 세계적인 부호임을 아는데 2~3년이 걸린 가진 자의 겸허함도 한몫했다. 그 의원 외에는 만찬장에서 미국 장관부부와 대학총장들, 정치인들, 기업인들이 권력가 티 없이 나를 참석자 중 유일한 ‘아시아 여자’가 아니라 ‘인간 학자’로 대한 성숙함도 한몫 했다. 그리고 남녀 동료들이 직장 일원이 성적 노리개로 취급받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준 덕분이었다.

귀국해서 계획에 없던 대학교수가 되었다. 한 남학생이 여학생들에 대한 원로(?)교수의 성추행을 막아달라고 찾아왔다. 신출내기 교수는 학교는 학생을 위해서 존재하고, 선생답지 못하느니 노점상으로 살겠다는 신념 탓에 거리낌이 없었다. 상담한 여학생들이 공개화를 원치 않기에 강의 중에, 특정 교수에 대한 언급 없이 성추행, 그리고 이혼할 의도 없는 유부남의 낚시용 사랑 고백을 경고했다. 필요시에 돕겠다고 했고, 내 말은 해당 교수께 전해졌다. 다행히 그 후 내가 아는 한 불상사는 없었다. 

역시 나잘난 탓이 아니었다. 국내 교수 권력에 대한 신참의 무지함과 문화적 충격이 한몫했다. 선임 교수들과의 학연과 인맥 덕에 임용된 것이 아니기에, 한국에서 불의와 적패보다 위중한 범죄인 배반자로 낙인찍힐 우려가 적었다. 그 후 인품과 학식 높은 많은 선량한 교수들을 뵈었다. 그 발치를 따라갈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의문은 깊어졌다. 

왜 한국에서 교수는 권력이 되었는가? 왜 권력가인 양 학생과 동료에게 갑질하고, 권력을 위해 도처에서 현대판 당파싸움을 하는가? 가장 많이 배운 자요, 타인의 인격을 함양하고 인권을 옹호해야 할 교육자들이 일부 자아도취적 권력 남용과 성폭력 가해자로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교육계와 종교계의 미투는 이 점에서 다른 직종과 다르다. 학내 미투가 교수의 자성과 자정 운동이 아니라 견디다 못한 학생 운동으로 시작된 현실은 역사에 남을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오랜 고통과 수치심과 침묵을 깨고 미투를 외치는 피해자들에게 이 사회는 말한다. 왜 그때는 가만히 있었냐고. 왜 죽을 각오로 거부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우리는 ‘No’를 가르치지 않았다. 우월적 지위에 대한 거부는 건방진 짓이고 집단에서 아웃사이더가 되는 지름길임을 가정, 학교, 직장, 사회에서 끊임없이 주입했다. ‘네,’ ‘가만히, 조용히 있으라’가 상명하복의 가부장적인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가르쳐온 덕목이다. 적어도 여자가 아니라 ‘아줌마’로 성별이 분류되기 전까지는. 세월호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기를 명한 사회, 성폭력 피해자들의 미숙함을 흉보고 대가를 치르게 하여 죽은 듯 침묵시키는 사회, 가해자의 권위와 체면이 우선시 되는 사회, 위계와 권력에 대한 순종을 교육하는 병든 사회를 조장하고 방관한 점에서 우리는 공범인 셈이다. 

존재하는 것들의 고귀함을 노래한 윌리엄 블레이크는 ‘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본다’했다. 권력 중독이 만연한 사회에서, 자기 만족적 위력행사로 누군가의 소중한 인격과 천국을 파괴한 길 잃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내려갈 때 볼 수 있기를.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조은영 편집기획위원/원광대·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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