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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必忠信, 行必篤敬
言必忠信, 行必篤敬
  • 최용전 대진대·공공인재법학과
  • 승인 2018.03.26 1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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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가 내게 보여준 붓글씨의 내용이다. 세종실록에 등장하는 글귀로 너무나 마음에 들어 항상 염두에 두고 생활한다. 아마 대부분의 박사학위를 가지신 분들은 정직하고 신뢰 있게 말하고, 성실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데 익숙한 것으로 알고 있다. 최소한 내 주변에 있는 분 중에 이 글귀에 어긋난 생활을 하는 분들은 없다. 내가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 보니, 우리 집 아이들이 어릴 때 어른들은 모두 석·박사인 걸로 알았다고 할 정도로, 우리 집에 놀러 오시는 분들이나 함께 식사를 하던 분들은 모두 다 석·박사였다. 이 분들은 학문적 깊이만큼이나 언행의 신중함은 높다. 하지만 경제적 형편은 그렇지 않다.

1997년 말경 IMF가 닥쳐왔다. IMF는 대학의 빈자리들을 더욱 더 적게 만들었고, 설령 자리가 나더라도 신분이 불안정하거나 경제적 여건이 부족한 연봉계약제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나도 박사과정을 수료한 상태였는데, 가족과 상의해 외국 유학을 가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대학에서 자리 잡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 사실상 도피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이 좋게 그해에 지방의 작은 전문대학에 교편을 잡게 됐지만 불행하게도 다시 퇴사하게 돼, 소위 ‘보따리장사’로 되돌아 왔다.

주변 지인들의 사례에 비춰 볼 때,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면 풍부한 전공지식 뿐만 아니라 생활태도도 대단히 양호하다. 그들은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거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거나 혹은 맡은 바 소임은 틀림없이 수행하는 인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박사학위소지자들의 경제적 형편은 인격만큼 평균인 이상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상대적으로 열악하거나 심각히 어려운 상황에서 연구하고 있다. 1990년데 대학설립준칙주의와 박사학위수여 자율화는 많은 박사학위소지자를 배출했으며, 동 시기부터 시작된 대학 입학정원 감소현상은 대학 일자리를 더욱 축소시키면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화로 박사학위소지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아마 많은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한 번쯤은 박사학위가 거추장스럽다는 것을 느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박사학위를 받도록 유도한 본인의 타고난 천성과 학문적 자존심이 꾸준히 연구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독려했을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자신을 버팀목 삼아 묵묵히 수도자의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천명의 늦은 나이에, 한국연구재단에서 시행하는 학문후속세대 학술연구교수에 지원해  선정됐다. 내게는 천금 같은 행운이며, 학술연구교수를 시작으로 다소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학술연구교수에 선정된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러나 주변의 박사학위 소지 연구자들을 돌아볼 때,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우수한 고급인력이 오래 전 선비의 청빈한 삶을 살면서 자본주의 시대에서 학문과 연구를 계속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스스로 연구와 가르치는 것이 좋아 택한 길이라지만,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하며 생활하겠지만, 자신에게는 물론이며 국가경제와 학문발전의 측면에서는 너무나 안타깝다. 

연구자에게 경제적 안정과 연구 환경의 제공은 폭발적인 연구 성과를 견인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한국연구재단에서 시행하는 포스트닥터와 연구교수 지원은 열악한 연구 환경에 놓여있는 석·박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는 단비이며 복음이다. 연구자의 가족들에게는 더 큰 축복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발인원이 너무나 적다. 매년 후배들은 경험 있는 선배라고 나에게 전화해 이것저것 문의하지만, 선발됐다고 회신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교육부도 우리나라 백년대계를 책임지고 있다 보니 너무나 바쁘겠지만, 우리나라의 국제 경쟁력과 미래를 위해 석·박사 연구자들에게 보다 폭넓은 지원방안을 마련해줬으면 한다. 가깝게는 포닥이나 학술연구교수 선발인원을 확대하고, 멀리는 불안정한 신분에 놓여 있는 석·박사 소지 연구자와 대학에 산재해 있는 계약제 연봉교수들의 현황을 파악해, 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재원마련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소위 보따리장사를 하면서 가장 바라마지 않았던 바를 언급하고 싶다. 대학에 소속돼 있지 않아도 한국연구재단에 등록된 연구자들이 국내외 학술자료를 마음껏 찾아 볼 수 있도록 디지털라이브러리나 연계시스템을 강화했으면 하는 바람을 적으며 글을 마친다.

최용전 대진대·공공인재법학과
단국대에서 환경권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원격의료제도와 지방자치제도 등에 대하여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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