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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회 공화국의 교수들
위원회 공화국의 교수들
  • 이덕환 논설위원
  • 승인 2018.04.30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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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요즘 정부가 운영하는 위원회 때문에 바쁜 교수들이 적지 않다. 정부 조직이 전국의 혁신도시들로 흩어지면서 교수들이 위원회에 쏟아 부어야 하는 시간도 부쩍 늘어났다. 복수의 정부 위원회에 이름을 올려놓을 정도로 유능한 교수들은 일과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야 한다. 위원회 활동이 본업이 돼버린 경우도 있고, ‘폴리페서’의 오명도 감수해야 한다.

정부가 운영하는 위원회가 차고 넘친다. 정확한 수를 파악할 수도 없다. 그야말로 ‘위원회 공화국’이다. 청와대(대통령실)·부처·산하기관·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위원회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장관·기관장·지자체장의 정책 자문도 위원회 몫이고, 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필요한 기획·심의·평가도 위원회가 맡는다. 헌법 초안도 위원회가 만들고, 법률이 요구하는 수많은 기본계획을 작성하는 실무형 위원회도 있다. 관료들의 역할도 변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떠맡은 위원회를 관리하는 일이 주업이다.

대부분의 위원회는 교수들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교수들이 탐날 수밖에 없다. 정부가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의 전문가를 찾을 수 있다. 전문성과 이해상충에 대한 논란도 피할 수 있다. 시간을 조율하기도 편하고, 쥐꼬리만한 회의비에 대한 불만도 없고, 적은 비용으로 용역사업을 떠맡길 수도 있다.

교수의 입장에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자신의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자신의 실력을 활용하는 實事求是의 기회도 된다. 전공 분야에서의 학문적·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기회도 된다. 관련 분야의 관료들과 인연을 맺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실질적으로 연구비 확보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고위 공직에 진출하는 영광을 기대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위원회 활동이 교수들에게 언제나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정부가 언제나 순수한 의도로 위원회를 운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가 미리 정해놓은 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해 교수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악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역사 교과서 개정이 그랬고, 현재 진행 중인 헌법 개정 작업도 그랬다. 더욱이 관료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교수들의 의견은 가차 없이 무시되어 버린다. 순진한 교수들 중에는 자신들이 관료들의 교묘한 각본의 들러리·거수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못하는 경우도 많다. 위원회에서 결정한 정책에 대해 논란이 불거지면 위원회에 참여한 교수들에게 책임이 돌아가 버리기도 한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정부가 위원회의 구성을 무력화시켜버리기도 한다. 지난 12월 29일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발표한 산업부가 그랬다. 운영 중이던 전력정책심의위원회에 맹목적으로 탈원전·탈석탄을 주장하는 11명의 위원을 추가로 임명해버렸다. 그동안 소신을 가지고 활동하던 위원들은 한순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돼버렸다. 물론 그런 일이 산업부에서만 제한적으로 벌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관료들만 위원회를 악용하는 것은 아니다. 위원회에 참여하는 교수들의 독선과 이기주의도 심각하다. 교수들도 자신의 영향력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의견이 다른 전문가들의 참여를 차단해버리고, 위원회의 운영을 독점해버린다. 허울뿐인 문?이과 통합을 강조한 2015년 교육과정개정 작업은 교육과정학 전공의 교수들의 놀이터가 돼버렸다. 지난 7년 동안 실질적으로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의 피해자 구제를 위해 환경부가 운영하는 여러 위원회들도 독성학과 환경공학 분야의 교수들이 독점해버렸다.

교수들이 위원회 활동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위원회 활동은 훌륭한 사회봉사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면 넘치는 법이다. 맹목적으로 매달릴 일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전문가로서의 양심과 소신을 굽히지 말아야 하고, 윤리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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