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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여성' '국내파' 과학자로 살아남는 법
[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여성' '국내파' 과학자로 살아남는 법
  • 황보전 경희대·학술연구교수
  • 승인 2018.04.30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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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전 경희대·학술연구교수

얼마 전, 남편이 요즘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이 꼭 내 이야기 같다면서 읽어보라고 권한 책이 있었다. 식물을 연구하는 호프 자런이라는 한 여성과학자가 쓴 『Lab Girl』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는 여성에게 불리한 환경에서도 자연과 과학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꿋꿋하게 연구하며 살고 있는 호프 자런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직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호프 자런처럼 나도 여성과학자로서의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고 한다. 

나는 여성과학자이자 아내이며 두 아이의 엄마다. 박사학위 과정 중에 결혼을 했고 2년 후 첫째 아이를 낳았다. 내가 연구하던 실험실에는 학위과정 중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경우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아이를 낳아 육아를 하다 보면 연구를 중간에 쉴 수밖에 없으니, 결혼 한다는 이야기나 아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지도교수님께 드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좋은 선례를 남겨야 이후에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 후배들이 좀 더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연구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힘겨웠다. 학위 과정 중에도 육아와 연구를 병행하느라 힘에 부쳤지만,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학위과정 동안 꽤 많은 논문들을 게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사학위를 받은 뒤, 외국으로 포닥을 나가는 동기들의 뒷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나만 뒤쳐지는 것 같아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다른 분야의 회사에 다니는 남편과 아이가 있는 내 상황이 걸림돌이 되는 것만 같아 너무도 속상했다. 그런데 마침 해외 포닥 경험이 없는 친한 선배가 한 대학의 교수로 임용됐다는 소식을 듣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 선배가 국내에서도 열심히 한다면 해외 포닥 경험을 갖고 있지 않아도 잘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고, 나도 그 선배처럼 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돌이켜보니 예전처럼 국내 연구 환경이 해외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도 않아 국내에서도 훌륭한 연구를 충분히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과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일관성 있게 계속 진행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한 환경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의욕도 강해졌다.

그러던 중 지도교수님의 권유로 처음으로 연구비 신청을 하게 됐다. 처음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지원했음에도 한국연구재단 리서치펠로우 지원 사업에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고 무척이나 감격스러웠고 놀라웠다. 하지만 스스로 연구 방향도 잡고 큰 연구비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과제 진행 초반에는 연구 진행과 연구비 관리, 학생 지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다소 어려웠지만, 과제를 진행한 3년 동안 차츰 차츰 학생일 때와는 달리 성장하고 있다는 자신감도 갖게 됐다. 

과제를 진행하는 동안 둘째 아이를 가지게 됐는데, 그때 다른 실험실 박사님이 내게 우리 분야에서 일하면서 어떻게 애를 둘 낳을 생각을 하게 됐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러면 안 되는 건가, 어떻게 같은 여성 분이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둘이면 확실히 육아 시간이 늘긴 하지만, 필자의 경우에는 남편의 엄청난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남편은 중요한 회식 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매일 늦게 퇴근하는 나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봐줬다. 그 덕분에 처음 진행했던 과제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첫 번째 과제에서 나온 실적들을 토대로 신청한 두 번째 과제도 리서치펠로우에 선정돼 안정적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모든 여성과학자들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지는 않다. 주변의 여러 여성 박사 동기들 가운데, 육아 때문에 연구를 중간에 그만 두는 동기들이 정말 많다. 현재 생명과학 분야는 여성 대학원생, 여성 연구원들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유능한 여성 연구원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결혼과 출산, 육아 등으로 경력이 단절되는 것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다. 『Lab Girl』의 저자인 호프 자런은 풀브라이트상을 세 번이나 수상했고, 2016년 타임지에서 선정한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들어갔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여성과학자다. 이 시대의 엄마이자 여성과학자인 모든 분들이 호프 자런을 보고 희망을 갖고 엄마로서 과학자로서 힘을 내길 응원한다. 그리고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돼주지 못했음에도 “엄마가 학교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자랑스러워요”라고 말해주는 딸아이와 항상 응원해주는 남편이 있어 오늘도 당당히 연구실로 향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황보전 경희대·학술연구교수
경희대에서 혈관신생 억제제를 이용한 암 전이 억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3년과 2016년 한국연구재단 리서치펠로우 과제에 선정됐다. 현재 구강암 림프절 전이 억제 신규 물질을 발굴해 그 물질의 작용 기전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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