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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 학자가 절실한 시대
유목민 학자가 절실한 시대
  •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
  • 승인 2018.04.3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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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학자는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뉜다. 한 유형의 학자는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좀처럼 눈을 돌리지 않고 그 분야만 깊이 있게 천착한다. 다른 유형의 학자는 자신의 전공 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인접 분야를 넘나들며 연구를 한다. 가령 문학으로 좁혀 말하자면 전자의 학자는 평생 특정한 한 작가, 특정한 한 문학 장르, 또는 특정한 한 시대를 연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이 유형의 학자는 누가 뭐래도 한눈을 파는 법 없이 자신의 전공 분야를 외골수로 밀고 나간다. 한편 후자의 학자는 일단 한 분야를 어느 정도 섭렵하고 나면 곧바로 다른 분야로 관심을 돌린다. 이 유형의 학자는 미국의 서부개척 시대 탐험가처럼 계속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나간다. 전자의 학자가 수직적 특징을 지닌다면, 후자의 학자는 어디까지나 수평적 특징을 지닌다. 쥘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전자는 ‘정착민적 학자’에 해당하고, 후자는 ‘유목민적 학자’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유형의 학자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할까? 두 쪽 모두 장단점이 있어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다만 어떤 교육 환경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느냐에 따라 전자가 바람직할 수도 있고 후자가 바람직할 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전자의 학자가 우세한 반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양에서는 후자가 우세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영문학자들은 마치 중국의 고전 문헌을 연구하듯이 영문학을 연구한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흔히 영문학 연구를 ‘강가쿠(漢學)’에 빗대어 ‘에이가쿠(英學)’이라고 부른다. 외국 문학을 전공할 때 일본인 학자들은 제일 먼저 사전을 만들고, 텍스트에 각주를 달고, 텍스트를 번역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작가에서 좀처럼 한눈을 팔지 않고 오직 한 우물만 판다.

이렇게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일본 학자들과는 달리, 영국과 미국 학자들은 문학을 거시적 관점에서 연구하려고 한다. 미국에서 영문학 교수들이 강의 시간에 자주 입에 올리는 표현 중에 “베오울프에서 버지니아 울프까지(From Beowulf to Virginia Woolf)”라는 것이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울프’라는 말에 운을 맞춰 만든 표현이다. 『베오울프』는 영문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8세기에서 11세기 사이 고대 영어로 쓴 작자 미상의 영웅 서사시를 말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 영국의 모더니즘 작가로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의식의 흐름 수법을 개척하고 완성한 사람이다. 이렇듯 미국 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특정한 한 시대의 문학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초기 영문학부터 현대 영문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폭넓게 연구하도록 가르친다. 비단 학생들만이 아니다. 교수들도 자신의 전공 분야와는 관계없이 모든 문학 장르를 망라하여 가르친다. 한 교수가 셰익스피어를 가르치는가 하면 현대 극작가를 가르치기도 하고, 시를 가르치는가 하면 소설도 가르친다. 

일본의 미시적 학문 연구 태도와 서양의 거시적 학문 연구 태도 중에서 우리는 과연 어느 쪽을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서양 학자들처럼 좀 더 거시적 관점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쪽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밀려 점점 설 땅을 잃어간다. 인문학 분야 학과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에 자리를 내어주면서 해마다 축소되거나 아예 폐지되고 있다. 그래서 인문학 학과의 교수 수도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수가 좁은 자기 분야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더구나 국가와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금 세계화 시대에 학자들은 학생들에게 폭넓은 시야를 길러 주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좁은 연구 영역에서 벗어나 좀 더 주변의 학문 영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착민적 학자보다는 유목민적 학자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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