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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패배감의 롤러코스터
끝없는 패배감의 롤러코스터
  • 이주희 이화여대·수리과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8.05.28 0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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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3월, 날씨가 풀릴락 말락 할 때쯤, 20세기 폭스와 영화사 하늘에서 대한수학회와 한국여성공학기술인협회를 대상으로 <히든 피겨스> 시사회 이벤트를 열었다. 흑인, 여자, 수학·공학자라는 공통점을 가진 세 명의 여자가 NASA라는 거대한 세상 속 편견에 맞서 유리천장을 깨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소수 집단 가운데 대표적인 소수 집단에 속해 있었던 그 당시 그들처럼, 여성 그리고 평범한 수학자인 내 이야기와 생각을 한 번 들려 드려볼까 한다.

어느 날 문득 인생의 즐거움에 대해 생각하다, 우연한 기회에 ‘학문의 길의 첫걸음’인 대학원에 진학하게 됐고, 또래 친구들보다 늦은 나이에 시작해 ‘설마 굶지는 않겠지’라는 막연한 마음가짐으로 시작한 그때, 학문을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나는 그저 행복했다. 능력보다는 열정이 넘쳤던 나는 주위의 뛰어난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연구를 하고 같은 길을 밟아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때는 자부심을 가졌고 충만했다.

‘행복 끝 불행 시작’이라는 구호라도 외치듯, 유학길을 뒤로 한 한국에서의 박사과정은 즐거웠으나 여성연구자로서의 시작은 결혼 후 육아와 함께여서 그런지 녹록치 않았다. 가족과 지도 교수님의 엄청난 도움으로 꿋꿋하게 과정을 소화하고는 있었으나, 그때 즈음 진정한 연구자가 되는 길이 거듭되는 실패와 자괴감과 함께하는 것임을 깨닫게 됐던 것 같다. 즐겁기도, 힘겹기도, 앞이 안보이기도 한 그 과정을 지나면서 그리 뛰어나지 않게 어쩌면 조금 부족하게 몇 편의 논문과 함께 마무리한 것이 아쉬웠으나, 훗날 비슷한 처지에서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참고할 만한 선례로 남았다고 하니 그나마 위로가 되기도 한다.

아쉬움과 함께한 학위과정을 마치고 나니 운 좋게도 연구재단의 과제들을 수행하게 됐고 원하는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졌다. 시키는 것만 하던 학생신분과는 달리 스스로 기획하고 책임지고 마무리하는 과제를 진행하면서 연구자로서 성장하고 성숙해져 간다는 생각에 뿌듯함도 갖게 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변 동료들이 우수한 연구를 발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그들이 임용이 되면서, 나와 같은 남겨진 자들은 묵묵히 성장함에도 불구하고 뒤쳐져 보여 다시 한 번 끊임없는 패배감을 극복해야 하는 때가 종종 찾아오곤 했다. 어떻게, 이보다 재밌는 롤러코스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최근 ‘산업수학’과 ‘인공지능’이 이슈가 되면서 가장 인기 있는 연구자가 수학자라고 하는 반가운 얘기를 듣다 좀 찾아보니, 이때 필요한 수학자는 모든 분야를 두루 섭렵한 소수의 수학자이거나 공학 분야와 함께 활용방안을 적용할 만한 방향성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수학이 익숙한 공학자들로 대체되기도 하는 듯해 보였다. 어찌 보면 수학자들의 영역을 공학이 점점 자리매김을 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어, 이 또한 반갑게만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자리걸음이라도, 그것을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보이는 것은 ‘점 하나’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흔적들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업적과 결과가 아니더라도 느리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나와 많은 연구자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그 걸음이 세기의 발자취로 남기를 기대하면서 오늘도 또 한걸음을 용기 내어 보기를 바래본다.

 

이주희 이화여대·수리과학연구소 연구교수
이화여대 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물인터넷 서비스기술을 위한 래티스 기반 서명시스템 개발에 관한 연구를 수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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