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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교육회의와 한국式 바칼로레아
국가교육회의와 한국式 바칼로레아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8.07.02 1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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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6월이면 프랑스 온 국민들의 눈이 바칼로레아로 쏠린다. 우리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바칼로레아 모두 국가공인시험이라는 점만 공통항으로 가질 뿐 성격은 전혀 다르다. 우선 바칼로레아는 논술형 시험이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객관식 시험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가를 측정하는데 반해, 바칼로레아는 학생들이 얼마나 자신의 의견을 잘 표현해내는가를 알아보는 데 그 목적을 둔다. 

지난달에 치러진 2018 바칼로레아 철학시험 문제를 보면 역시나 눈을 한참 사로잡는다. 인문계 문제로는 △문화는 우리를 더 인간적으로 만드는가? △우리는 진실을 포기할 수 있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문 읽고 평하기, 자연계 문제로는 △욕망은 우리의 불완전함에 대한 표시인가?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불의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한가? △『논리의 체계』(존 스튜어트 밀) 지문 읽고 평하기, 경제사회계 문제로는 △모든 진리는 결정적인가? △우리는 예술에 대해 무감각할 수 있나?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밀 뒤르켐) 지문 읽고 평하기 등 이었다. 

계열별 3개의 질문 중 하나를 골라 4시간 동안 답안을 기술하면 된다. 20점 만점에 10점을 넘기면 통과하는 시험이라 대학진학을 염두에 두고 바칼로레아에 응시하는 수험생의 90% 가량이 합격한다. 흥미로운 것은 바칼로레아가 진행되는 일주일간 전 프랑스의 이목이 시험문제에 쏠린다는 것이다. 학생은 물론 성인들도 회사에서 또는 식사 시간에 자연스럽게 토론 주제로 시험문제를 논하고, 정치인들도 TV나 라디오에 출연해 그 해 출제된 시험문제에 대해 자신만의 답안을 말하는 풍경이 매우 자연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천안문 사태가 벌어진 1989년의 문제는 △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가? 였으며, 정치인의 탈세로 얼룩진 2013년의 문제는 △정치에 관심이 없으면서 도덕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였기 때문이다.

혁명기를 거쳐 나폴레옹 시대에 공론화 된 교육제도개혁 논의는 1808년 바칼로레아의 탄생으로 귀결됐다. 큰 수정 없이 지금까지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프랑스 온 국민들을 생각하게 만들고 있는 이 마법 같은 교육체제, 바칼로레아. 

한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들여다본다. 정답 아닌 것 골라내기,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 한 하루의 객관식 시험에 모든 것을 쏟아 붇는 제도, 창의성 보다 암기력이 좋은 학생이 뛰어난 학생으로 평가받는 시험…이렇게 십 수 년을 ‘친구’라 부르는 ‘경쟁자’와 살아온 학생들에게 바칼로레아는 정말 요원해보이기만 한다. 물론 프랑스는 절대다수의 국립대와 일부 그랑제꼴이 동거하는 체제로 한국에 참고할 만한 사례일 뿐 입시제도를 직접 비교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국가교육회의가 숙의, 공론화의 과정을 거쳐 百年之大計인 교육정책을 설계하는데 여기저기 서 절대평가제 전환부터 수능폐지론까지 많은 말이 오간다. 하지만 진로적성에 따라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는 2022년부터는 입시 제도가 바뀌어야할 것임에는 분명하다. 지금의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대학에 가는 2025년이다. 사실 고등학교에서 논술식 시험을 당장 시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초등학교 교육부터 바뀌어야 한다. 시간의 힘을 견뎌내며 고전을 읽고, 에세이를 쓰는 훈련을 해야 바칼로레아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생각의 근육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공공성 강화를 가장 큰 교육정책 기조로 삼는 문재인 정부가 공약대로 국가교육회의를 국가교육위원회로 승격해 중량감을 늘린다면? 1,2년 단기대책이 아니라 중장기 계획을 짜면서 사회적 논의와 공론화 과정을 거칠 수 있다면? 정권이 바뀌어도 교육정책의 큰 틀을 유지할 수 있다면? 온 국민이 토론하는 한국式 바칼로레아도 그리 먼 꿈은 아닐 것 같다.

 

윤상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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