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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다시 행복해졌다
문득 다시 행복해졌다
  • 이정인 포항공대·박사후연구원
  • 승인 2018.08.27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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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어느 날 원고 요청을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 그 흔한 글짓기, 독후감상 한번 받아보지 못한 내가, 날이 너무 더워 정신이 혼미했는지 그 날은 아무런 고민 없이 바로 수락했다. 그리고 바로 후회하며 매일 고민했다. 박사학위를 받고 4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박사’ 라 불리는 것이 아직도 어색한 비정규직 연구원 신분인 내가 과학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내가 느낀 비정규직 연구원의 101개의 비애를 나열하기에는 A용지 1장은 매우 부족하다. 그러다 문득 수많은 시련과 비애를 맛보는 비정규직 여성 연구원이지만, 평생 연구를 업으로 생각하고 하루하루 성공보다 실패를 더 경험하며 연구하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 졌다. 

학창시절 장래희망 칸에 단 한 번도 과학자를 쓴 적 없다. 그저 고등학교 시절 수학과 과학을 좋아해 화학공학과에 진학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학원에 입학했고, 석사과정 내내 무엇이 그리 힘들었는지,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지만 ‘졸업만 하자’를 인생 목표로 2년을 보냈다. 그 후, 연구는 끝이라 생각했지만, 또 무엇에게 홀렸는지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매일 12번 넘게 후회하며 ‘오늘 하루만 최선을 다하자’라는 생각으로 365일 동안 연구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재미있었다. 연구하면서 90% 이상은 실패고 헛발질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안에서 기쁨을 얻기 시작했다. 그때가 박사 2년 차 때쯤이었다. 석사과정 때처럼 여전히 인생의 목표는 ‘박사 졸업’이었지만, 이유는 달랐다.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고 싶어 빨리 졸업하고 싶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이 박사’ 타이틀을 얻은 뒤, 앞날에 꽃길이 펼쳐지고 모든 게 원만하게 해결될 줄만 알았다. 하지만, 학위과정을 다 마치고 보니 길 없는 광활한 대지 위에서, 사방을 쳐다보며 외쳐도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나 홀로 막막하게 서 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졸업과 동시에 엄마가 됐으니, 여성과학자로서의 삶이 그리 녹록지 않았다.

아이를 출산하고 100일 만에 해외 포닥 기회가 주어졌다. 누구나 내 상황이면 당연히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많은 고민 끝에 나 자신이 행복해야 내 아이에게도 행복을 전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가족의 도움을 받아 홀로 미국으로 향했다. 만약 누군가가 지금 다시 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 두고 온 가족들 때문인지, 외국으로 포닥을 나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한눈팔고 놀아가며 연구할 수 없었다. 일요일의 늦잠조차 내게는 사치였다. 하루 20시간 연구하며 많은 결과를 얻었지만, 나의 행복감이 점점 사라지는데 1년 반이라는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가족한테 가자’라고 다짐하고 이것저것 알아보던 중, 지도교수님의 추천으로 한국연구재단 ‘대통령PostDoc.펠로우십’ 사업에 지원했다. 전에 4번이나 후속세대지원 사업에 지원했지만, 한 번도 선정되지 않아 사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2단계 발표평가 시 한국에 들어갈 수 있으니 그것만이라도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행히 발표평가 대상자에 선정돼 한국에 귀국할 수 있었다. 

1주일 만에 미국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정말 극적으로 최종 선정됐다. 과제가 선정되지 않으면, 앞으로 연구를 못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과제가 최종 선정되면서 독립적인 연구를 진행할 좋은 기회를 얻게 됐다. 또한, 박사과정 때 충만했던, 하지만 한동안 잃어버린 채 살았던 연구에 대한 열정도 되찾을 수 있었다. 

과제 시작 후 1년 동안, 나의 신분은 변함없이 미래가 불안정한 비정규직 여성 연구원이다. 매일 롤러코스터를 타듯, 성공과 실패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그래도 최소한 과제가 끝나는 시점까지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에 감사하며, 더 성장하는 독립 연구자가 되기 위해 느리지만 꾸준하게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또 다른 길이 기다리고 있겠지…’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아이 어린이집 선생님과 학부모 면담을 했다. 선생님의 ‘일하시느라, 아이도 돌보시느라 많이 힘드시겠어요’라는 말씀에 나는 망설임 없이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괜찮아요. 제가 선택했으니까요’라고 답했다. 대답하고 나서, 나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연구는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평생 업으로 삼아야 하는 일이라고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문득, 다시 행복해졌다.

 

이정인 포항공대·박사후연구원
UNIST에서 리튬 이차 전지용 실리콘 음극 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7년 대통령PostDoc.펠로우십사업에 선정돼 중대형 에너지 저장 시스템을 위한 나트륨(Na) 기반 전지 개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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