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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신화' 영어 절대평가
'잘못된 신화' 영어 절대평가
  • 안성호 한양대 영어교육과·전 한국영어학회장
  • 승인 2018.09.03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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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7일 교육부는 2022학년도 대입제도에서 기초과목 중 영어만을 계속 ‘절대평가’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를 지니고 있다. 영어관련학술단체협의회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이 정책의 도입 취지와 달리, 사교육비는 과목만 바뀌었을 뿐 줄어들지 않았고, 여전히 학생들은 경쟁을 안 할 수 없으며, 영어교사 임용 감축 및 영어 시수 감축으로 중등 학습자가 영어 능력 향상을 중도에 포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이 절대평가 방식의 또 다른 문제점들을 좀 더 심도 있게 고찰하고자 한다. 정부 방안의 절대평가는 표준점수와 백분위에 의존하지 않고 ‘원점수’에만 의지해 90점 이상을 1등급으로 하고, 10점 단위로 총 9개 등급으로 나눠 수험생들을 자리매김하는 방식이다. 평가 전문가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이는 절대평가가 아니라 엄연한 상대평가 방식이다. 학습·수험생들에게 성취해야 할 기준을 미리 구체적으로 제공하고 그에 따라 등급을 정하지 않고, 상대적인 취득 점수에 따라 등급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 정책의 위험성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정책이 수능 영어시험의 ‘불안정성’을 더 키운다는 점이다. 사실 표준점수와 백분위 수치를 활용하는 건, 출제자들의 난이도 조절 실패 가능성을 통계적으로 통제(보완)하기 위함이다. 연도별로 수능시험의 난이도가 변하더라도, 이 표준점수와 백분위를 통해 수험생이 자신의 실력을 더 공정하게 ‘상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는 2018학년도 수능부터 그러한 통계적 ‘버팀목’을 영어 과목에서는 제거해버렸다. 물수능, 불수능이란 표현이 말해주듯이 매년 출제자가 바뀌는 현 수능 출제 체제에서는 연도 간 난이도를 동일하게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에 따라, 영어에서는 동일한 실력을 가진 수험생이 연도별 시험 간의 난이도 차이로 인해 다른 등급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 이런 방식이 어떤 면에서 개선일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수능에서 영어를 쉽게 하자는 정책은 중등 영어교육의 파행을 가져와, 궁극적으로 영어가 ‘기본’인 21세기에 영어 학습 부담을 학습자 본인과 가계에 떠넘기는 원치 않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중등 영어 과목의 수업시간이 축소되면, 농어촌 지역 및 저소득층 학생들은 중등 영어 교육을 통해 제대로 된 대학 교육 준비 기회를 받을 수 없게 된다. 

현재의 지식기반 경제는 고등교육을 요구하고, 대학교육은 여전히 상당한 ‘학술 영어’ 역량을 학생들에게 요구한다. 특히 경상계열, 자연계열, 공학계열 등에서 그런 요구가 심하며, 학년이 올라갈수록 이런 요구는 더 심해진다. 이를 고려해 몇몇 대학들은 영어 전용 강좌를 다섯 과목 내외로 학생들이 의무 수강하도록 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등 공교육 현장에서 대학 과정을 이수하는 데 필요한 영어 실력을 학생들이 제대로 갖추도록 가르치지 못한다면, 대학에서 요구하는 영어 실력을 갖추기 위한 학습 부담은 고스란히 대학교 입학생 개개인과 부모, 즉 ‘가계의 몫’이 되고 만다. 그때(대학생에게) 발생하는 사교육비는 통계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이런 이유로 정치적 추궁을 받을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이미 대학생 학원비가 중고생 학원비보다 더 비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상 은밀하게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한 가계 부담이 증폭되는 것이다. 

수능 영어 절대평가(=불안정한 상대평가) 유지는 이 평가방식이 우월하다는, 또 원점수가 더 믿을 만하다는 ‘잘못된 신화’에 근거하고 있다. 표준점수와 백분율을 사용함으로써 그 불안정성과 잘못된 신화를 바로잡아야 한다. 또한, 기초과목 간 비대칭성도 바로잡아야 한다.

지금과 다른, 진정한 의미의 절대평가는 분명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교육과 평가가 그 방향으로 ‘개선’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절대적인 평가 기준을 올바르게 수립해 중등교육 현장이 그에 따라 진행되도록 해야 한다. 물론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영어)교육학적·교육실천적 진보를 가져올 것이고, 국가의 문화와 경제를 더 튼실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사교육비 부담을 낮추는 ‘합리적’인 길은 영어 공교육에 더 높은 예산을 배정하는 것임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안성호 한양대 영어교육과·전 한국영어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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