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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불신 사회
전문가 불신 사회
  •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 승인 2018.09.0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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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제19호 태풍 솔릭이 큰 피해를 남기지 않고 물러나고 모처럼 평화로웠던 일요일 오후. 뜻밖의 거센 후폭풍이 몰아쳤다. 일기예보를 책임진 기상청장이 재임 13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경질돼버렸다. 태풍 예보와 무관하다는 청와대의 변명은 누가 봐도 옹색한 것이었다. 국가 통계를 책임진 통계청장도 날벼락을 맞았다. 역시 소득 분배와 고용 관련 통계가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았던 탓이라는 해석이 더 일반적이다.

정부가 전문직 관료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관행은 어제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임금의 건강관리를 담당했던 御醫도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어떠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과학기술 명예의 전당’에 올라있는 세종 시대의 과학자 장영실도 예외가 아니었다. 동래현의 관노로 태어난 장영실은 자격루를 비롯해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어낸 공로로 종3품에 발탁되기도 했다. 그런데 장영실이 감독해 제작한 가마가 세종이 타기도 전에 부서져버렸다. 장영실은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곤장 80대를 맞고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장영실을 총애했다던 세종의 배려는 곤장 20대를 감면해준 것뿐이었다.

정부의 전문가에 대한 불신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가 그렇다. 과학기술의 전문성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행정 능력이나 경험을 고려하는 것도 오니다. 오로지 개인적 인맥이나 대선 캠프 경력에만 신경을 쓴다. 연구비 관리 문제로 검찰에 고발된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가 사달이 난 경우도 있었다. 원자력이나 전력 분야에서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철저하게 배제돼 버렸다. 21세기 과학기술 시대의 정부가 정작 과학기술 전문가를 배척하는 황당한 상황이다.

1988년 스탠퍼드대의 제임스 피시킨이라는 언론학자가 개발한 여론조사 방법인 숙의를 통한 ‘공론화’가 전문가의 입지를 빼앗아가 버렸다. 작년 여름 국무총리 훈령으로 운영돼 신고리 5·6호기의 공사 재개를 결정했던 공론화위원회의 경우가 그랬다. 원전 전문가들에게는 숙의 과정에서 기본적인 자료를 제출하는 기회마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은 대입 정책을 결정해달라는 교육부의 요청으로 구성된 공론화위원회에서도 조금도 변함없이 반복됐다. 정작 신입생을 선발해야 하는 대학의 입장은 철저하게 배제됐다.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을 지낸 공론화위원장도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국민들이 대입에 대해 이렇게 민감하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는 발언은 코미디였다. 그런 공론화 과정을 통해 교육부가 확정한 대입 정책은 당연히 현장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공허한 것을 수밖에 없었다. 포항대가 교육부의 안을 단호히 거부했던 것은 그런 현실 때문이었다.

전문 분야의 마피아는 반드시 척결해야 한다. 교육 마피아도 제거해야 하고, 원자력 마피아도 청산해야 한다. 그렇다고 국가 운영에서 전문가를 배제하는 것은 절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인 대한민국이 전문성이 철저하게 결여된 포퓰리즘으로 진정한 ‘창조적 선진 사회’로 거듭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밀실에서의 검은 야합에 의한 積弊를 거부하고, 법과 제도가 분명하게 살아있는 法治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도도한 촛불 민심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전문가를 배제한 공론화가 법치 사회를 만드는 길이 될 수 없다.

물론 전문가들의 책임이 무겁다. 세계적 수준의 전문성과 함께 국민이 인정할 수 있는 윤리의식을 갖추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문성이 부족하고, 윤리적으로 타락한 전문가가 설 땅은 어디에도 없다. 눈앞의 개인적인 이익에 매달리는 엉터리 전문가는 확실하게 퇴출시켜야 한다. 대학도 생각을 바꿔야 한다. 학생 선발에 대한 관심은 무의미한 것이다. 오히려 전문성과 윤리성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화려한 구호보다 내실이 더 중요하다.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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