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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가지 않은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다
아직은, 가지 않은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다
  • 한덕기 제주대·생명공학부 박사후연구원 
  • 승인 2018.10.08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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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과학 문명의 발전과 함께 지구 환경에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되면서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더불어,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과 오존층 파괴로 자외선량 증가와 같이 전 지구적인 환경문제들이 발생해 극지 환경이 가진 지구기후 조절의 중요성 또한 인식하게 됐다. 실제 최근 북극 해빙의 급격한 감소에 따른 북극 해양환경을 비롯한 전 지구적 기후 변화와 관련된 우려 깊은 예측들이 나오고 있으며, 인류사회가 당면한 위기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현재 발생하는 기후변화의 원인과 그 영향을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나아가, 미래 기후변화 양상을 정확하게 예측하기 위해 과거의 기후변화 기록들을 복원하고 이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2010년 석사학위를 마친 후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 극지연구소에서 2년간 연구원으로 근무한 게 계기가 돼 극지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당시에는 한국 최초의 쇄빙연구선 ‘아라온’이 첫 북극해 탐사를 시작하던 시기로, 필자 역시 아라온호의 첫 북극해 탐사에 참여한 것이 인연이 돼 지금까지 극지 해양미생물의 생태를 연구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8차례의 북극해 탐사에 참여하며 지속해서 북극 기후변화에 따른 해양환경 변화 및 박테리아플랑크톤의 생태변화를 규명하고 있다. 그간의 연구결과를 통해 북극 해빙이 가장 많이 녹는 여름철 시기에 표층 해수 염분도가 감소하면서 박테리아플랑크톤 서식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북극해의 표층 아래 심층 해수에서의 물리·화학적 변화 역시 박테리아플랑크톤의 서식환경을 뚜렷하게 반영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울러 북극해의 수문학적 변화가 미치는 퇴적 양상을 미생물학적으로 규명이 가능함을 확인했다. 이후 북극에서 고대 지구의 기후환경 특성들이 (서로 교란돼 있지 않고) 보존된 퇴적층들에 한해, 과거에 형성된 미생물 서식환경이 지금까지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확인했다. 필자는 현재 지구 기후변화의 역사를 연구하는 고기후학자(paleo-climatologist)들과 연대해, 북극해 퇴적층을 대상으로 지구 해수면 상승이 활발했던 과거 1만 년 동안의 기후변화 특성을 파악한 뒤, 이를 미생물의 서식환경과 연계해 고기후학에 적용이 가능한 미생물 기원의 고기후 복원기법을 개발 중이다. 

모든 학문 분야가 그렇겠지만, 특히나 극지를 탐사하는 연구자들에게는 도전정신과 모험심이 요구된다. 북극해 연구의 가장 큰 어려움은 거친 파도와 추위가 아니라, 이전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큰 보람은 가서 직접 보았기 때문에 알게 됐다는 것이다. 이에 극지를 탐사하는 연구자들은 오늘도 불철주야 끊임없는 노력으로 주어진 미션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후대에 그것을 전달하고 있다.

다른 연구자와 마찬가지로 필자 역시 폭풍 같은 학위 기간을 보냈지만, 돌이켜보면 절반쯤은 취미생활로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학위를 취미로 했다는 표현에는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스스로 자문해 봐도 학위 이후의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주류에서 벗어난 학문을 오로지 재미로만 선택해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누가 시켜서 했다면 과연 그렇게까지 열정적인 시간을 보냈을까 싶다. 만약 진행 중인 연구에서 기대하는 성과에 도달한다면, 그 아름답고 미련한 시절에 대한 보상이 되지 않을까도 싶지만, 솔직히 생각만큼 쉬운 연구가 아닌지라 단기간의 어떤 결과를 예상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돌봐야 할 가족도 생기고 비전임 연구원으로 주변의 시선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처음의 열정도 많이 사그라들었다는 느낌이 들지만, 감사하게도 도움과 응원을 주시는 지인들과 한국연구재단의 연구과제 덕분으로 아직은 가고 싶은 길을 더 가볼 수 있을 것 같다. 

항상 가슴에 품고 있는 데카르트의 “도달할 수 없는 아주 먼 진리는 없으며, 발견하지 못할 만큼 깊이 감추어진 진리도 없다”라는 문구를 상기하고자 한다. 데카르트는 진리탐구를 위한 올바른 자세로 인식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부터 시작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영역까지 연구하고 그다음은 후대가 이어서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필자 역시 그의 조언대로 주어진 시간까지는 최선을 다해 이 연구를 수행할 생각이다. 그리고 남은 진리의 탐구는 후대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한덕기 제주대·생명공학부 박사후연구원 
광주과학기술원에서 환경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북극을 비롯해 국내 연안의 해양미생물 생태를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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