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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미디어
당파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미디어
  •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
  • 승인 2018.10.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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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

지난 대통령 선거 때다. 그때 인터넷 전쟁이 끔찍했다. 이 전쟁의 주도권을 쥔 집단은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킨 사람들이었다. 그 전까지는 전혀 달랐다. 국가권력을 쥔 자들이 국가기관을 움직여 돈까지 함부로 쓰며 댓글 부대를 만들고 뉴스 기사마다 추천, 찬성, 반대에, 온갖 편견과 마타도어를 담은 댓글들을 양산했다. 

물론 댓글만이 아니다. 뉴스 기사 자체를 국가기관이 자기 입맛에 맞게 주조하고 퍼뜨리고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악의적으로 매도했다. 국가 안보를 내세우고, ‘종북이다, 빨갱이다’ 하는 낙인으로 시민들을 갈라놓고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렸다. 천안함 침몰이나 세월호 참사(학살극인지도 아직 알 수 없다)가 있을 때마다 광기는 극에 달했다. 

표현이 거칠어진 것을 양해해 줬으면 한다. 그때 텔레비전 공중파 및 종합편성채널 방송, 종이신문, 급조된 인터넷 신문, 소위 애국 단체들은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때가 많았다. 단식을 하는 유가족들 앞에서 이른바 폭식 투쟁을 한다며 “자유시간”이라는 초콜릿을 한 무더기 쌓아 놓고 조롱을 일삼던 젊은이들은 누가 ‘보낸’ 것이었으며, 이를 화면에 담아 이슈거리를 만든 사람들은 누구였던가. 촛불혁명이라는 시민들의 항거가 없었다면 민주주의는 숨이 막혀 버렸을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말이 쉽고, 또 지고한 가치의 담지자인 것만은 아니다. 나는 지난 노무현 정부 시대에도 민주주의라는 말에만 매달리지 말 것을, 민주주의는 인간이 만든 여러 제도 가운데 하나일 수 있음을, 민주주의 만능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있음을 말했다. 

그럼에도 지난 두 해 동안 이 민주주의라는 말만큼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격동시킨 말도 없다. 사람들은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광화문에서, 다른 온갖 곳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염원했다. 그리고 이 민주주의가 기적처럼 우리 앞에 다가왔다. 탄핵이라는 것도 있었고 다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마침내 새 정부가 세워졌다. 가망 없을 것 같은 절망감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이 민주주의가 새로운 시험대 위에 올라 있음을 본다. 무엇보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표면상 달성되자마자 경제적 차원에도 그것이 확장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아파트 값이 오르고 최저임금 인상은 자영업자와 노동자들의 갈등을 빚었다. 실업률도 낮지 않고 무엇보다 정부의 재벌개혁 의지는 확연히 퇴조했다. 

다음으로, 드루킹 문제부터 최근의 가짜 뉴스 파동에 이르기까지 인터넷 매체 등을 중심으로 한 언론 및 표현의 자유가 자칫 위축될 수도 있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정부가 주력해야 하는 문제가 과연 가짜 뉴스, 유언비어 같은 것일까? 그것이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첫번째 요인일까?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나는 삼 년 동안 팟캐스트를 베개 삼아 잠을 청하고 눈을 떴다. 숨 막힐 것 같은 정치 상황은 힘없는 일개 서생에게조차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제 권력이 교체되자 팟캐스트는 온통 친정부 목소리로 변했다. 공중파, 종합편성채널의 매체들도 새로운 ‘우세종’ 파당의 목소리를 다투어 내보낸다. 지난날의 보복도 아니라면 허무한 반복이다. 

적폐라는 것은 물론 아직 완전히 씻기지 않았다. 사법부에서 벌어진 지난날의 일들을 접할 때면 도대체 법정에 서는 사람들은 누구를, 무엇을 믿을 수 있나 한다. 부정부패, 탈법, 남용은 곳곳에 남아 있다. 숨겨진, 도피해 놓은 돈들도 많을 것이다. 헌데, 이 때문에 적폐만을 씻어내야 한다 함은 마치 국어 문법을 만점을 맞지 못했으므로 계속해서 문법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적폐 청산의 메아리 속에서 나는 새로운 고독을 맛본다. 현재는 낙관적인가? 남북 협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요즘은 유튜브가 나의 새로운 베개다. 양승태, 김부선, 노회찬은 늘 찾는 키워드이고, 김어준, 주진우, 김갑수도 찾아본다. ‘이해생각’, ‘사람나라’는 새로 만난 친구들이다. 그러고는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과 「크리미널」,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남 몰래 흐르는 눈물」, 김산의 「그 시인」, 또 조수미와 조성진과 조혜령을 듣는다. 

음악에는 파당이 없다. 정치보다 음악이 좋다. 예술과 문학이 다시 살아야 한다. 당파성으로 무장한 언론과 방송이 못 보는 것을 보고 못 듣는 소리를 내야 한다.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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