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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를 위한, 비주류의 학문
비주류를 위한, 비주류의 학문
  • 임미리 한신대·학술원 전임연구원
  • 승인 2018.10.29 1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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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국회 앞에서 시작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노숙농성이 1년째 접어들고 있다. 올 초 영하 10도의 혹한이 이어졌을 때 주 1회 그들을 대신해 농성장을 지키겠노라고 자청한 일이 있다. 이유가 뭐냐, 동정과 연민 때문이냐는 질문이 날아왔다. 동정이 아니라 공감 때문이며 연민이 아니라 지지와 연대의 마음이라고 답했다. 

또 누군가가 물었다. 왜 농성을 하게 됐냐고. 왜 형제복지원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연구자 신분에 왜 활동가나 다름없이 행동하느냐는 뜻이었다. 비주류라서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나 자신이 비주류이기 때문에 형제복지원 생존자처럼 정상에서 배제된 사람들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또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주류처럼 행동할 필요도 못 느낀다는 것이었다.

나는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직장을 다니다 대학을 갔다. 약 30년에 걸쳐 띄엄띄엄 학사와 석사, 박사를 하면서 여러 직업군에서 일했다. 전공도 학사는 역사, 석사는 행정, 박사는 정치학이다. 연구자로서 전공은 사회학에 가깝다. 학위 받은 학교도 모두 다르다. 이만하면 비주류를 자칭할 만하지 않은가.

2011년 박사과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자격증 따는 게 목적이었지 공부를 계속할 생각은 못 했다. 마음이 바뀐 건 순전히 지도교수 때문이다. 살면서 늘 ‘나는 다르다’고 외쳤지만 다른 그것을 납득시키거나 옳다고 주장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나의 지도교수는 『여공 1970, 그녀들의 반(反)역사』와 같은 책을 통해 그 다른 것을 세상에 내보여 지지를 얻고 있었다. 나도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의지만으로는 부족했다. 늦게 다시 시작한 공부로 학위를 받고 연구자 신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지도교수와 주변 여러 선배 또는 스승인 학자들의 공감과 지지 때문이다. 목매달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의 가혹한 비판도 있었지만, 비판대로 논문 전체를 뒤엎어 새로 쓰니 결론이 몇 배로 풍부해졌다. 전생에 덕을 쌓아 복 받는 거려니 생각해 감사 인사도 제대로 안 했다.

나의 학문적 관심은 내 존재와 마찬가지로 비주류에 속하는 것들이다. 한국연구재단의 학문후속세대 지원사업에 선정된 것은 그것에 관한 사회적 공감과 지지가 제도적으로 승인된 것으로 생각한다. 재단은 올해 해당 사업에서 소외분야 연구에 신규과제 예산의 5% 내외를 할당하겠다고 밝혔다. 적정한 비율인지는 가늠할 수 없으나, 새롭게 또는 더 많은 공감과 지지를 보낸다는 데서 고무적인 일이다.

인문사회과학에서 소외분야란 소외계층이나 소외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학문적 탐구는 지배와 권력의 이면을 밝힘으로써 사회와 역사의 실체에 더욱 접근하게 할 수 있다. 소외는 권력에 의한 배제로써 본질을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소외된 것 안에는 배제를 낳은 권력의 작동원리뿐 아니라 예외상태의 특수성이 함께 담겨있다. 소외된 1%에는 나머지 99%의 작동원리와 함께 1%만이 갖는 고유성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소외분야에 대한 탐구는 사회와 역사의 실체를 밝히는 것에 더해 그것을 더욱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드는 일이다.

다시 형제복지원으로 돌아가 보자. 동정과 연민을 거부한다는 것은 객체가 아니라 주체임을 천명하는 일이다. 거꾸로 진정한 공감과 지지는 대상의 주체성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공부를 다시 시작한 뒤 내가 받은 공감과 지지도 내가 갖는 연구자로서의 주체성을 인정한 데서 나왔을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굳건히 내 자리를 지키며 과분하게 받은 공감과 지지를 세상 모든 소외된 것들에 보내는 것뿐이다.

 

임미리 한신대 학술원 전임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정치에서 저항적 자살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기동부연합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고립」을 주제로 논문을 썼으며 택시노조운동, 도시하층민의 정치적 주체화 과정 등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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