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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의 어머니, 올렌카
파벨의 어머니, 올렌카
  • 조영일 문학평론가
  • 승인 2018.11.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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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가 그린 여인

체호프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최근에는 도리어 여러 측면에서 비판을 받는 소설이 있다. 단편 「귀여운 여인」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항상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올렌카는 첫 번째 남편인 극장지배인과 결혼하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사별 후 두 번째 남편인 목재상과 결혼하자 이번에는 목재야말로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더니 또 다시 남편과 사별 후 수의사와 친해지자 이번에는 공중보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가 전출을 하자 그녀는 삶의 의미를 잃고 넋이 나간 채 지내게 된다. 이에 대해 화자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무엇보다도 큰 불행은 자신의 주관이라는 것이 전혀 없어진 것이었다. 남편이나 수의사가 곁에 있었을 때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고,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수의사가 가족과 함께 돌아오고 올렌카는 수의사 대신 그의 아들 사샤에게 사랑을 쏟게 되면서 예전의 활기찬 모습을 되찾게 된다.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서.    

확실히 지금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올렌카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이 소설이 나온 시기(1899)에도 그러했다. 실제, 당시는 러시아에서 여성해방주의운동이 크게 화제가 된 시기이기도 했다. 이 작품과 관련해 몇 가지 입장을 살펴보면, 먼저 자주 회자되는 톨스토이의 극찬을 들 수 있다. 만년의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무려 네 번이나 읽었다고 하는데, 그가 그토록 마음에 든 이유는 헌신적이고 숭고한 여성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리키는 입장이 달랐다. 그는 올렌카에게 존재하는 ‘노예와 같은 종속성’을 비판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그의 대표작 『어머니』를 그에 대한 비판으로 보기도 한다. 레닌은 원칙 없이 행동하는 한 당원을 올렌카에 빗대면서 사랑했던 대상을 쉽게 잊는 망각능력과 줏대 없는 태도를 풍자적으로 비판했다. 

이런 올렌카에 대한 부정적 입장은 10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소설가 권여선은 ‘귀여운’이라는 말에 담긴 수동성을 문제 삼으면서 “귀여운 자는 자기를 귀여워하는 자의 욕망을 흉내 냄으로써 자기 욕망의 미숙함과 공허함을 감춘다”고 비판하면서 올렌카의 이야기를 귀여워하는 시선에 갇힌 한 여성의 비극으로 단정했고, 시인 김소연은 한발 더 나아가 “귀여운 모습은 세상을 살아가기에 아직 무능한 존재들이 누군가의 사랑을 얻어 보호를 받기 위한 생존전략”이라고 말하며 올렌카를 펫(pet)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올렌카는 정말 그토록 비판을 받아야 할 존재일까. 체호프가 올렌카라는 여성을 창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올렌카와 같은 여성을 긍정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희화화하기 위함일까. 연구자들은 대부분 후자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체호프가 쓴 편지에는 그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언급도 엿보인다. 그리고 그는 올렌카와는 전혀 다른, 말하자면 「약혼녀」의 나쟈 같이 자의식이 강하고 능동적인 여성도 등장시킨 바 있다. 하지만 그가 창조한 어떤 여성 캐릭터도 올렌카만큼 강렬하지는 않으며, 어떤 의미에서 이 캐릭터는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고 있다.

제목 ‘귀여운 여인’은 일본어로는 ‘かわいい女’이지만 영어로는 ‘The Darling’으로 번역된다. ‘pretty woman’이 아니다. 러시아어로는 두셰치카(душенька)로 ‘사랑스러운 사람’을 가리킨다. 그녀가 첫 번째 남편을 사랑하게 된 것은 어려워진 극장경영으로 괴로워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즉 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사랑으로 발전했다. 또 올렌카는 소설에서 점잖고 기풍 있고 건강하고 정이 많아, 남자들은 물론 여자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았다고 돼 있다. 즉 그녀는 남자들에게 특별히 사랑을 갈구하거나 그들의 욕망에 자신을 맞춘 것이 결코 아니었다.

물론 그녀에게서 이렇다 할 자의식이나 욕망이 보이지 않다는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욕망을 삼각형의 형태, 그러니까 ‘매개된 욕망’(지라르)으로 보았을 때 그러하다. 누군가를 속이고 질투하고 상처입힘으로써 더욱 강렬해지는 욕망 말이다. 이런 욕망을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올렌카의 욕망보다 더 가치가 있는, 그러니까 반드시 추구돼야 하는 것으로 강요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사샤가 성장해 혁명운동가가 되어 탄압을 받게 되면 올렌카는 어떻게 행동할까. 그녀는 파벨의 어머니(『어머니』의 주인공)가 되지 않았을까.

조영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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