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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 본연의 미덕과 선비문화의 염결(廉潔)을 함께 보여준 이름
상아탑 본연의 미덕과 선비문화의 염결(廉潔)을 함께 보여준 이름
  •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 승인 2019.01.29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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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스승 16. 예악 동행의 참 선비, 교육학자 정범모

“광복 후 나의 지성어(知性語)는 갑자기 영어로 변했다.” 운주 정범모(雲洲 鄭範謨) 교육학자의 자술은 바로 한국현대화의 압축 증언이다. 대륙 한어권에서 오래 맴돌던 한반도였는데 국권을 잃은 뒤론 근해(近海) 일어권에 속했다가 드디어 대해(大海) 태평양 영어권에 들면서 압축근대화에 성공했음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간단한 개관이다.

그는 영어를 지성어로 받아들인 제1세대였다. 신운(身運)도 비상했다. 경성사범을 나온 뒤 끌려간 징병에서 한 달 만에 일제 패망으로 살아 돌아왔다. 신생 대한민국 정부가 재목을 뽑아 국비유학생으로 출국시키는데, 운주도 일원이던 일진(一陣)이 떠난 지 불과 나흘 만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볏짚을 등에 지고 뛰어든 불길에서도 살아 돌아온다.”는 사주팔자라고 간단히 자위할 운주가 아니었다. 선택받았음을 사명으로 읽었던 지성(至誠)이었다.

▲ 운주 정범모(雲洲 鄭範謨, 1925- )“가끔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이 있다. ‘선생님의 후배나 제자 중엔 장관도 지내고 부총리도 지내고 총리도 지낸 사람이 많은데, 왜 선생님은 안 나가셨습니까? 와달라고 청을 받은 적이 없습니까? 그렇지도 않을 텐데...’ 그럴 때면 나는 ‘그런 청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해야 믿겠소, 아니면 있었다고 해야 믿겠소?’라고 웃으면서 얼버무려 버린다.” 출처: 윤주영(『우리시대를 이끌어온 사람들 50인』, 2008, 88쪽)
▲ 운주 정범모(雲洲 鄭範謨, 1925- )“가끔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이 있다. ‘선생님의 후배나 제자 중엔 장관도 지내고 부총리도 지내고 총리도 지낸 사람이 많은데, 왜 선생님은 안 나가셨습니까? 와달라고 청을 받은 적이 없습니까? 그렇지도 않을 텐데...’ 그럴 때면 나는 ‘그런 청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해야 믿겠소, 아니면 있었다고 해야 믿겠소?’라고 웃으면서 얼버무려 버린다.” 출처: 윤주영(『우리시대를 이끌어온 사람들 50인』, 2008, 88쪽)

 

미국에서 돌아와 펼친 학계 활동은 우선 전인미답이던 현대 교육학의 초석 놓기였다. 1950년대 저술이 교육평가·교육통계·교육과정에 집중되었음은 “교육이나 심리학을 연구하려면 아이들의 심리특성을 알아야 하기에” 그 자료의 과학적 정리와 실증분석에 초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 교육과학을 실무현장에 적용·확인하려고 전진기지를 만든 것이 한국행동과학연구소였다.  행동과학은 인접 학문과 함께하는 학제(學際)연구방식을 취한 현대 사회과학의 대명사다. 운주가 한국미래학회에 열심이었음도 ‘미래연구’ 역시 학제연구가 기조임을 엿보았기 때문인데 1970년대 중반부터 내가 학회 살림에 일조하던 사이 접촉·대면할 기회가 많았다.

학회에서 마주칠수록 존경의 마음이 더해갔다. 마침 회갑이 임박했음을 알고는 교육학계가 학덕을 기릴 기념문집을 만들 양이면 나도 말석에 끼어달라고 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직계들이 제의해왔지만, 대신 내가 직접 적어 교실에서 다하지 못했던 생각을 나누려 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엄명’을 내렸다!” 단호한 기색이라 더 이상 말을 못 붙였다. 그즈음이 서울대 사범대학장을 거쳐 초치되어갔던 충북대학 초대 총장직에서도 물러난 직후였다.

이후 운주는 거의 해마다 한 권씩, 그것도 교육학을 넘어 세상을 조감하는 문명비판 책을 펴냈다. 우리 학문의 근대화가 서구이론의 원용에 급급했던 ‘서초(西抄) 타성’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를 직접 꿰뚫어 보는 예지의 저술이었다. 거기서 크게 감명을 받았다는 내 독후감에 이후는 출판 직전 초고도 종종 보여주었다. 그럴 때면 내 배움 증진의 한 방편으로 윤문(潤文) 가능성을 가끔 제안하기도 했다.

『미래의 선택』(1989)은 한국의 미래를 “경제주의 대 전체조화론, 단기주의 대 장기 안목, 수단 가치 대 내재가치, 집권 대 분권, 능력주의 대 평등주의, 서울 지향 대 전국 지향” 같은 대척 가치의 지양 또는 조화에 있다고 설파했다. 이후 한국사회의 존속과 번영을 염원하는 저술 하나(『한국의 세 번째 기적: 자율의 사회』, 2008)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이라는 “한강의 두 기적”에 더해야 할 제3의 기적은 ‘자율성’ 가치의 사회화에 있다고 설파했으니 거기엔 “나라를 염려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라” 했던 조선조 대 석학 정다산의 정신이 깊게 깔렸다.

만나면서 엿보았던 운주의 반생은 공맹학이 말하던 예악(禮樂)의 화신이 분명했다. 예악의 현대개념은 기율 대 신명 이항(二項) 가치의 동행인데, 운주로 말하자면 교단에서 심기가 불편해질 때면 윗도리 단추를 매만져 안정을 찾으라고 미래의 사범들에게 귀띔하는가 하면, 한림대 총장 재직 시 교수채용 마지막 관문인 총장 면담에서는 앞으로 연학(硏學)에 힘써 줄줄 믿는다며 그 인사를 미리 하는 자리라고 몸을 낮추었고, 청탁받은 원고는 항상 마감 전에 건네는 기율의 체화였다. 한편, 스승을 어렵게 대하던 후배들을 대동한 맥줏집 뒤풀이에선 스포츠로 단련된 몸으로 허슬(Hustle)춤을 함께 추며 사제 간 위계(位階) 거리를 좁히던 신명이었다.

『그래, 이름이 뭔고?』는 당신 자전(2008)이다. 제목은 “넌 누구냐?”라는 물음인데 후배, 제자들이 장관 자리로 나아갈 적에도 당신은 굳건히 한국교육·미래를 밝히는 연학에만 시종했으니, 시절이 바야흐로 산학(産學)·정학(政學) 시대인데도, 상아탑 본연의 미덕과 선비문화의 염결(廉潔)을 함께 보여준 이름이라 크게 손뼉 칠 사계 인사는 많고 많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캘리포니아대에서 도시계획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가르쳤고, 저서로 『한국공간구조론』,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이 있다.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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