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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logue] 분노의 정치학은 누굴 위한 것인가
[Cinelogue] 분노의 정치학은 누굴 위한 것인가
  • 교수신문
  • 승인 2019.08.23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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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정재형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1920년 홍범도 장군과 독립군의 활약을 극화한 <봉오동전투>는 분노의 감정으로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전영화를 본듯한 허전함과 씁쓸함이 자리한다. 이 영화를 구성하는 감정의 단위는 치욕, 분노, 복수의 삼단계를 거친다. 일본군 장교들의 흉악한 모습과 조선에 대한 모멸, 순진무구한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여 잔혹하게 살해하는 장면들이 이어지며 관객들은 치욕에 몸을 떨게 된다. 이어 분노로 이를 가는 독립군들은 인질로 잡은 젊은 일본군 장교에게 인간적인 온정을 베푼다. 나중에라도 살아서 조선인이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증언해 달라는 뜻이 담겨 있다. 독립군들의 유인책에 쉽게 속아넘어가 계속 죽어나자빠지는 일본군들의 모습은 그들이 어떻게 아시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도록 바보, 멍청이처럼 그려져 있다. 마침내 일본군들을 몰아넣고 통쾌한 복수의 순간들이 펼쳐진다. 마지막에 그 모든 전투를 지휘한 홍범도 장군의 등장은 하늘에서 떨어진 영웅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이런 식의 프로파갠더 오락영화는 북한영화에서 흔한 공식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홍범도장군의 자리에 김일성이 온다는 것이다. 영화사적으로 보면 영웅사관은 오래 전에 사라진 구시대의 유산이다. 이러한 주체적인 역사해석과 영웅숭배는 북한에서 오래 전부터 해왔던 인민결속을 위한 영화적 수단이다. 과거 역사적 상처를 어떤 식으로 치유하는지 미국영화 두 편을 보면 한국영화의 낙후성을 극명히 느낄 수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만든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다. 

이 두 편은 하나의 현실을 두 개의 측면에서 그려낸다. 흔히 유황도로 알려진 이오지마는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점령했던 섬이다. 미국해병대는 이 섬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병사들이 성조기를 끌어올리는 장면을 찍어낸 종군기자의 사진이미지로 이 유황도의 격전은 미국인들에게 영웅심과 애국심의 상징으로 길이 기억되는 전투다. 헐리우드는 이 역사적 사건을 영웅주의적으로 기록해낸 존 웨인 주연의 <유황도의 모래>를 만들었다. 영웅주의와 애국주의를 통해 일본에 대한 증오와 미국의 역사적 주체의식을 분명히 세우는 영화다. 

그후 <아버지의 깃발>은 그러한 과거의 역사관을 다시 재해석해낸다. 전쟁의 역사를 국가와 영웅의 역사에서 국민과 서민들의 역사로 전유한 것이다. <아버지의 깃발>은 미국인의 시각을,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일본인의 시각을 그려낸다. <아버지의 깃발>에서는 당시 전쟁터에서 깃발을 끌어올렸던 전쟁영웅들을 국가가 얼마나 홍보하고 이용했는가를 고발한다. 또한 이용가치가 다한 전쟁영웅들이 국가에 의해 버려져 비참한 말로를 보낸 것을 증언한다. 전쟁은 국가가 벌인 것이고 동원된 것은 국민이고 희생된 것도 국민이다. 희생된 국민의 시각과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여 희생시킨 국가의 책임을 질타하는 영화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일본인의 시각에서 유황도전투를 그려낸다. 이미 패배를 인정한 일본은 장군을 보내 섬을 지키라고 하면서 군수물자의 공급을 중단한다. 이 황당한 일본 정부의 조치를 알면서도 끝까지 항전하고 조국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고백이 담겨져 있다. 이 영화를 보면 대동아전쟁의 책임은 일본군수뇌부와 정치가들에 있지 병사들에 있지 않음을 알게 한다. 전쟁의 이면과 메카니즘을 잘 들여다 보면 증오가 불을 뿜어야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직시해야 한다. 증오의 대상은 애국을 팔고 정치적 오판을 하는 각 나라의 정치가들이 아닌가. 분노도 좋지만 차분하게 그 국민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정치가들의 판단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영화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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