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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몇 개냐?
너는 몇 개냐?
  • 교수신문
  • 승인 2019.11.1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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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훈 (서울대 박사후연구과정)
문경훈 (서울대 박사후연구과정)

인생을 화끈하게 살지 못하고 결단 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니 박사과정을 마치는데 파리에서 1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프랑스는 시위의 나라답게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시위들이 벌어지는 곳이다. 판사들이 파업하는가 하면, 시위 경찰들이 거리에서 가두행진을 하고 다른 경찰들이 시위 경찰들을 통제한다. 아마 지구상의 모든 가능한 시위는 파리에서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가 목격하고 경험한 시위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2009년 봄,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대학개혁 정책에 반대하여 대학교수들이 벌인 시위였다. 당시 대학교수들은 학생들과 같이 거리에 나서기도 했지만, 그들이 주로 벌인 시위는 파업의 일종인 수업 거부였다. 이례적으로 교수들의 파업은 거의 한 한기 동안 지속되었고, 이로 인해 대학생들과 대학 행정에 큰 혼란이 야기되었다.

교수들과 학생들이 프랑스 정부의 대학개혁 정책에 반기를 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교육과 학문을 무한경쟁체계에 편입시키려는 신자본주의적 교육정책이었다. 프랑스 대학은 세계 대학 서열에서 늘 중위권 이하에 머물러 있었고 특히 이공계에 대한 대학 차원의 재정 지원은 열악했다. 프랑스 우파 정부는 이러한 국공립 대학 시스템에 개혁의 칼날을 휘둘렀다. 물론 적지않은 이공계나 법학계, 상경계 교수들은 정부의 정책에 찬성하였지만 인문학 교수들은 정부의 정책에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한 교수는 대학원 세미나 시간에 자신이 교수 파업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여 더 이상 세미나를 진행하지 않겠다며, 그 사정을 학생들에게 설명하였다. 그 교수의 말에 따르면 정부가 입법예고한 정책 중에는 대학교수는 의무적으로 매년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해야 하는 조항이 있는데, 이러한 정책이야말로 학문과 연구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몰상식한 정책이자, 교수들에게는 수치를 안겨주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연구에 대한 성과로서 논문을 발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이 학문의 내적 논리가 아니라 외부에서 정해진 강제조항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얼마나 연구자를 무시하는 것이며, 이러한 정책의 대상이 되는 교수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냐는 것이다. 모든 연구가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양적으로 논문 편수를 늘리는 것이 과연 학문의 진정한 발전에 기여 할 수 있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눈을 현재의 한국으로 돌려보자. 우리는 늘 내실 있는 연구와 교육을 앞에서 내세우면서도 뒤에서는 논문 편수에 따른 점수를 계산한다. 특히 교수 임용을 목표로 하는 학문후속세대들은 이러한 논문 편수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를 상대적으로 심하게 받는다. 교수초빙 공고가 많이 올라오는 기간이면 많은 선배 교수들로부터 ‘너는 몇 개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지원 가능한 유효 논문의 편 수를 묻는 말이다. 그리고 몇몇 선배 교수들은 친절하게도 논문 업적 관리에 대한 자신의 노하우를 후배 연구자들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요지는 많은 논문 편수, 좋은 대표논문 몇 개, 게재가 상대적으로 쉬운 해외학술지에 논문 투고하는 요령. 평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평가 기준에 맞게 최대한 노력하여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최소 비용, 최대 효과라는 요상한 법칙에 집단 취면이 걸린 우리들은 자꾸 좋은 논문과 대충 실을 수 있는 논문을 구분하여 작성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자꾸만 외적 필요성에 따라서 논문을 쓰게 된다. 물론 외적인 강제성과 의무감이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는데 촉발 요인이 되기도 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기도 한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자극의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유혹의 손길은 거부하기 힘들다. 정말 안타깝게 생각되는 일이지만, 두어 달 동안 한국을 뒤흔들었던 조국 사태의 시발점은 조국 전장관의 딸의 스펙 부풀리기에 대한 문제였다. 제 생각에는 딸의 스펙 문제는 했느냐 안 했느냐라는 진위의 문제라기보다는 충실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논문 작성이든, 인권센터 인턴 활동이든 그것을 제대로 수행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능력에 대한 외적 지표인 스펙과 그 활동의 충실성, 이 두 요소의 괴리에서 허위의 문제가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논문을 쓸 때마다 이 논문은 발표할 만한 논문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이러한 불편한 질문이 논문 점수에 대한 집착과 요령의 유혹을 견디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너는 몇 개냐?’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마음은 조급하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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