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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교수들의 칼럼읽기
진중권의 교수들의 칼럼읽기
  • 진중권 중앙대
  • 승인 2003.09.18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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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윤리성이 결여된 글쓰기

진중권 / 중앙대, 미학
*이번호부터 월1회로 진중권의 칼럼읽기를 연재한다. 한달간 일간지에 실린 교수칼럼에 대한 비판을 담을 예정이다.

사실 신문의 칼럼은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분들이 글을 싣기에 썩 적합한 공간이 아니다. 저널리즘을 위한 글쓰기는 학적인 글쓰기와는 전혀 다른 논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학적 글쓰기가 장편소설이라면, 신문칼럼은 그 구성원리가 반전의 묘미가 있는 꽁트에 가깝다. 학적 글쓰기가 집중적 사유를 요한다면, 신문칼럼은 다양한 주제에 기민하게 대응할 산만한 사유를 요한다. 학적 글쓰기는 객관성을 지향한다면, 칼럼은 분명한 당파 취함을 지향한다.

주요 신문에 실리는 교수들의 칼럼이 싱겁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마치 텔레비전 PD가 영화감독으로 성공하는 게 힘들 듯이, 교수이면서 논객으로서도 뛰어난 경우는 많지 않다. 그 방면에서 재능을 보인다 싶으면 이번엔 학적 글쓰기 쪽이 신통치 않다. 물론 두 분야에서 모?뛰어난 이도 더러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매체의 차이와 스타일의 차이를 제대로 의식하지도 못한 채 글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간 신문에 쓰는 교수들의 칼럼을 보며 느끼는 몇 가지 문제점을 세 가지 측면에서 지적해 보기로 하자. 첫째, '전문성'의 부족이다. '전공'과 '전문성'은 좀 다르다. '전문성'이라 함은 보편적 원리를 현실에 일어나는 다양한 케이스에 적용시켜, 사안에 대해 깊이 있는 해명을 제시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런 능력이 결여된 글은 대개 학부 수준의 '일반적인 잡동사니'로 지면을 소모하다가, 결국 이렇다할 논리적 연관도 없이 바로 사안에 대한 결론으로 비약하기 일쑤다.

전문성을 갖지 못한 글은, 현실의 구체성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아주 높은 추상의 수준에 머물면서 안전한 발언으로 남으려 한다. 이런 글들은 읽어보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그런 얘기들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얘기'는 하나마나한 얘기다. 신문사에서도 교수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전문성'이 아니라 '전공'을 요구하는 듯하다. 이 경우 글쓴이의 이름 밑에 붙은 전공의 표시는 그 빈약한 글에 '전문성'의 아우라를 뒤집어씌우는 기호로만 소비된다.

둘째, '미학성'의 결여다. 칼럼니스트들의 경우에는 그걸로 밥을 먹어야 한다는 절박한 경제적 이유에서, 글쓰기의 미학에 늘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읽혀지지 않는 순간 자신은 상품으로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교수들의 경우엔 칼럼이 본업이 아니라 부업이다 보니 글쓰기의 미학에 무감각한 경향이 있다. 그 결과 그들이 쓰는 칼럼은 종종 나른한 일요일 오전 목사님 설교만큼 지루한 몰개성적인 글이 된다. 형식 자체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스타일리스트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논문과 달리 칼럼은 촉각적인 글쓰기다. 그것은 독자들의 신경세포를 때려, 그들의 몸속에 기입되는 것을 지향한다. 이런 글을 쓰려면 생생한 시각적 가시성을 띠는 구체적인 사소한 것들 속에서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메시지를 읽어내는 눈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개별자 속에서 보편자를 보고, 보편자를 생생한 개별자의 형상으로 제시하는 상징, 비유, 혹은 은유의 수사학적 '감각'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교수들의 칼럼은 종종 보편성에 치우쳐 있고, 형식을 통해 더 큰 내용을 말하는 스타일리스트의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다.

셋째, 윤리성'이다. 조작은 사실을 날조하고 해석을 왜곡하기 전에 이미 어떤 주제로 글을 싣고, 어떤 주제에 침묵할 것이냐를 선택하는 데부터 일어난다. 신문 기자들이 글을 청탁할 때 그들은 이미 그 글이 배치될 매트릭스를 미리 짜놓은 경우가 태반이다. 말하자면 앞으로 쓰여질 그 글은 쓰여지기도 전에 이미 특정한 메시지를 담고 있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 데스크에서 제 멋대로 붙이는 제목과 소제목의 마술이 첨가되면, 글쓰는 이는 졸지에 알지 못하는 어떤 다른 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스피커로 전락하게 된다.

약삭빠른 분들은 이 거시정치에 자신의 미시정치를 합류시켜, 미리 알아서 해당 신문사의 논조에 맞춰 입술서비스를 하기도 한다. 여기서 모종의 공모가 일어난다. 그렇지 않은 분들은 상아탑에만 들어 계시느라 종종 현실 정치의 복잡한 맥락에 안타까울 정도로 '나이브'해, 자신도 모르는 새 스스로 망가지기도 한다. 요구되는 글쓰기의 윤리성이란 남을 위한 것, 즉 글로 독자를 속이지 않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을 위한 윤리, 즉 미시권력의 망으로 이뤄진 매트릭스 속에서 제 존재를 유지하고, 배려하려는 미학적 윤리성이다.

진중권 / 중앙대 겸임교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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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 2003-09-26 18:02:35
진교수님의 글을 여기서도 보게되어 기쁩니다. 자연과학이라는 일종의 형이하학적 측면으로 판단되는 학문의 전공자로서, 글쓰기에 대해서는 언제나 힘이들고 어렵게 생각하는 저로서는, '미학적 윤리성'이라는 이말은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