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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조명 : 기호학적 연구의 최신동향
학술조명 : 기호학적 연구의 최신동향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9.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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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에서 현실로 내려온 기호학

재작년의 눈발처럼 희미해졌던 기호학이 문화담론의 중심으로 거듭나고 있다. 기호학을 평단에서 쫓아냈던 맑시스트들의 태도는 이런 것이었다. "한 문학텍스트의 기저에 깔린 규칙체계들을 묘사한 후에 구조주의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물러나 앉아 다음엔 무얼할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기호학이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내걸고 대중에게 적극적인 말걸기를 시도하고 있다. "기호학을 모른다면 의미에 고립되고, 조정당하는 꼭두각시 주체밖에 될 수 없다"라고 말이다. 바르트의 신화론이 보여준 매력과 그레마스의 체계이론에 대한 환호가 그친 지난 10여년간 기호학 내부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 것일까.

최근 유럽에서 불고 있는 응용기호학의 활황은 그 이유를 얼마간 설명해준다. 프랑스 리모쥬대의 자크 퐁타뉴 교수, 이탈리아 볼로냐대의 움베르트 에코와 파블리오 교수, 독일 베를린대의 베를린학파가 주도하는 응용기호학은 크게 두 흐름으로 나눠볼 수 있다.

경영마케팅을 이끄는 기호학

하나는 기호학의 실용화다. 광고마케팅 등에서 "의미작용의 최적화"를 설계해주는 사람으로 기호학자가 활용된다는 것이다. 리모쥬대에서 전략기호학을 연구하고 돌아온 백승국 청주대 교수(기호학)는 "지금까지 커뮤니케이션·포지셔닝 전략에는 신문방송학, 심리학 또는 사회학 쪽에서 영향을 미쳐왔는데, 거기 기호학의 고정좌석이 마련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 사설 응용기호학연구소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 김성도 고려대 교수(기호학)도 "예전엔 단순히 광고기호학이 패턴이었다면, 요즘은 기업의 전략, 현실적인 컨셉트, 이미지 메이킹에 기호학이 적극 활용되고 있다"라며 기호학 전공자들이 1백% 취업되고 있다고 유럽의 분위기를 전한다.

통계적, 계량주의적 방법만으론 복잡다단해진 수용자의 취향을 읽어낼 수 없다는 기업의 현실적인 판단이 가로놓이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호생성과정에 있으며, 그 기호들 간의 관계에서 의미가 갈리고 사물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기호학의 최초의 통찰이 점점 현실 수면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용화 말고 다른 한 갈래는 타학문과의 제휴현상이다. 기호학과 생물학의 만남인데, 서구에서는 요즘 바이오-세미오틱스(Bio-semiotics)가 주가를 올리고 있다. 생명현상을 기계적, 물리화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체 구성요소들 간의 의미작용과 커뮤니케이션 양상으로 보고 분석하는 학문이다. 1990년대 이후 통합과학을 목표로 설정한 기호학의 도전이 깔려있다.

박여성 제주대 교수(화용론)는 "과학이 분화되면서 개별 학문체계에서 학자들이 인위적으로 갈라놓은 기호학적 질서들은 이제 융합과학으로서의 기호학 속에서 그 원초적 구조가 재구성돼야 하는 벅찬과제 앞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기호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과 문화를 고찰한다면, 가정과 직장생활, 경제와 행정, 예술과 종교 등을 통일체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호학의 새로운 과제를 국내에서 실행하는 연구자 집단이 바로 '기호학연대'다. 화쟁기호학을 제창해온 이도흠 한양대 교수(국문학), 에코 기호학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가로 명성을 얻고 있는 박상진 부산외국어대 교수(이탈리아문학), 대중문화와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강인규 위스컨신대 교수 등 국내외 여러 대학에서 기호학 및 기호학 관련 학문을 전공한 30∼40대 소장학자들 18명의 모임이다.

 

2002년 1월 결성된 이 모임은 기호학을 온갖 문화사회현상에 대입해서 풀어낸 두툼한 저작물을 벌써 두권이나 펴냈다. 하나는 지난해에 나온 '기호학으로 세상읽기'(소명출판 刊)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막바지 교정작업을 하고 있는 '대중문화 낯설게읽기'(문학과경계사 刊)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대중문화 실제분석에 주력하고 있는데, "서양학문의 수입 오퍼상이 되는 걸 거부하고 우리 기호학을 세우기로 하였다"는 취지에서 보듯 한국의 주류 이론기호학에 대한 일정한 '봉기'의 성격을 띠는 책이다.

작년에 나온 책에선 사진, 영화 속 음식기호, 연극, 멋, 대화, 에로티시즘, 광고, 문학 등에 대한 분석이 이어지고 맨 마지막으로 맑스주의자 이경천의 기호학에 대한 반론이 실렸고, 올해 나온 책은 그 영역을 더욱 넓혀 '신창원 사건'에 대한 신문보도를 뒤집어본 김기국 경희대 교수의 글, 베를린 기호학파의 최대성과인 '동작사전'의 몸짓기호학을 이원복의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에 적용한 박여성 교수의 글이 실려 눈길을 끈다.

기호학에 쏟아지는 오해와 비판에 대한 반론 성격의 총론을 쓴 이도흠 교수는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대중을 수동적으로 파악, 독자의 해석의 자율성도 간과"했다고 비판함으로써 기호학을 옹호하는데, 이에 더해 알튀세르 등의 구조적 마르크시즘의 통찰을 기반으로 "텍스트만 보면 비판적인 것이, 사회 전체구조에서는 체제 유지 기능을 하는 '탈춤' 같은 사례를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못보고 있다"라고 맹비판하고 있다.

대중문화 분석의 주류이론이었던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밀어내고 기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비판적 학문으로서의 기호학의 자리를 전망한 글이다. 이제는 비판가들조차 기호학의 이러한 모험을 '구조주의'라는 오래된 우물에 푹 담궈버릴 수는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비판은 가능하다.

자본의 마술에서 벗어날지는 미지수

가령 이경천 박사는 "기호학이 사람들에게 자율성 및 자기 충족성에 관한 현상을 갖도록 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복종시킨다"라고 비판한다. 기호학은 텍스트를 해석하는 해석자의 자율성과 주체형성은 만족시키지만, 그것의 현실화에는 여전히 뒷짐이라는 비판도 뒤따른다. 그렇다면 기호학의 진보적 실천은 자본의 구조를 해체하고 재형성하는 일인데, 이것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아직까지 국내의 상황은 기호학이론의 현실적용이 올바르게 됐는가, 깊이 있는 분석이 됐는가를 논란으로 삼는 수준에 멈춰있다.

김성도 교수의 경우 "한국기호학회가 있는데 굳이 기호학연대를 만드는 것은 기호학의 다양성보다는 제도적 해체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며 또한 "기호학연대의 분석은 문화에세이로 흘러, 개념적 정확성과 전문성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고 이론기호학자들의 의견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런 비판에 대해 기호학연대의 백승국 교수는 "이론으로만 만족해온 기호학을 현실에 적용했을 때 오류는 필연적 현상일 뿐"이라고 맞선다. 백 교수는 올 10월 열릴 부산국제영화제를 텍스트 삼아 "외신보도에서 외국인들이 느끼는 부산영화제의 정체성, 가치,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분석"해볼 요량이라고 밝혔다.

통합과학으로서의 기호학, 실용적·비판적 현실참여로서의 기호학 등 세가지 차원에서 기호학이 담론시장에 복귀하고 있다. 그 속도는 매우 빠르고 다채롭지만 기호학 외부의 사회과학계에서는 이를 우려스럽게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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