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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지조’(共命之鳥)를 추천하며
‘공명지조’(共命之鳥)를 추천하며
  • 교수신문
  • 승인 2019.12.1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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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2017년이었다. 그 해의 사자성어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추천하여 선정되었다. 그때 나는 ‘파사’의 다음에 ‘현정’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고, 국내외 정치, 경제 상황은 예사롭지 않게 뒤엉켜 꼬여만 있어 우려된다.

뉴스를 보거나 월급쟁이로 살아가는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현실은 마치 지옥 같다. 출근길에 아파트 문을 열 때면 으레 정호승의 시 ‘밥값’이 떠오른다. “어머니/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중략)/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 사람 사는 곳이 바로 지옥인 셈이다. 눈앞의 현실을 성찰해보려는 의도에서, 이번에 나는 기억 속에 맴돌고 있던 ‘공명지조(共命之鳥)’를 추천하였다. 그게 덜컥 선정된 것이다. 잘난 척하게 된 것 같아 쑥스럽다. 선정되지 못한 분들께 미안하다.

최근 나는 이 시대에 필요한 말이 ‘공명지조’(줄여서 공명조)라 생각하고 수시로 입에 담고 있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가 지금 좌우라는 진영 논리로 쫙 갈려져 살벌하기 때문이다. 도처에 죽기 아니면 살기로 서로를 쳐다보며,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있다. 갈기갈기 찢어진 사유와 이념의 영토. 그곳이 바로 전쟁터이고 지옥 아닌가. 남(타자)은 상처이고 고통이고 절망이다. 희망은 타자를 철저하게 죽임으로써 획득된다고 ‘믿는다!’ 그런 믿음이 지배하는, 인간의 마음을 다스릴 법이 없는 ‘말법(末法)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진리[道]보다도 독선과 교만과 시비가 난무하는 시대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불교의 『아미타경(阿彌陀經)』, 『잡보장경(雜寶藏經)』등 여러 경전에 등장하는, 산스트리트어 jīvajīvaka[기파기파가耆婆耆婆迦로 음역함]를 의역한 새의 이름, ‘공명지조’(共命之鳥)를 문득 떠올렸다. ‘목숨[命]을 함께=공동유지[共] 하는 새[鳥]’. 히말라야 기슭이나 극락에 사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새이다. 줄여서 공명조(共命鳥) 또는 동명조(同命鳥)라고도 한다. 두 생명(生命)이 서로 붙어 있어 상생조(相生鳥), 공생조(共生鳥), 생생조(生生鳥), 명명조(命命鳥) 라고도 한다. 음역으로 기파조(耆婆鳥)라고도. 이 불교 설화는 인도의 서북부 지역에서 불교경전에 흡수된 다음 차츰 경전의 번역과 석굴의 벽화를 매개로 동아시아로 전파되었다. 공명조는 머리는 2개인데 몸통은 하나이다. 한 머리는 낮에 일어나고 다른 머리는 밤에 일어난다. 몸은 하나인데 마음이 둘인 셈이다. 한 나라의 백성인데 두 가지 마음으로 쫙 갈라진 우리 현실과 흡사하다. 두 마음이기 때문에 화합이 쉽지 않다. 시기・질투하며 으르렁대던 어느 날, 한 머리가 맛좋은 과일을 저 혼자 먹는 걸 다른 머리가 알고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다른 머리는 한 머리에게 복수하기 위해 독 있는 과일을 먹는다. 결국 독이 온 몸에 퍼져 둘 다 죽고 만다.

공명조의 이런 슬픈 전설이 상징하는 것은, 에셔의 그림 <악마와 천사>에서처럼, 모든 생명은 자타가 상의상존하는 연기적(緣起的) 관계라는 점이다.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此生故彼生, 此滅故彼滅, 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는 상호의존성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대단히 심각한 이념의 분열증세를 겪고 있다. 양 극단의 진영을 만들어 서로 적대시하며 끝장 낼 듯 혈전 중이다. 그러는 동안 모두 위험한 이분법적 원리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다. 각 진영의 정의와 도덕성이 독선적으로 폭주하고자 한다. 아무 생각 없는 맹목적 이념기계가 도로 위를 질주하고자 한다. 공공세계와 단절된, 한 집단만의 독단론, 자폐적 행동이 전체화 하려한다. 자기검열과 자아비판의 건강한 힘을 상실하여, 반전가능성(反轉可能性, reversibility)도 반증가능성(反證可能性, falsifiability)도 보이지 않는다.

정치라는 물건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우리 사회가 제발 상생의 비전을 찾아갔으면 한다. 이념이 아니라 삶이다. 그 지혜는 결코 밖에서 오지 않는다. 우리 안에서 만들어내야 한다. 추악하고 짜증나는,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향기로운 꽃이 만발하는 극락을 이뤄가야 한다.

공명조가 노래하는 극락은 서로 다른 사상과 자유와 의견이 폴리포니를 이루고 각양각색-천차만별이 용서되면서 화합하는 곳이다. 자유와 자율과 자치를 부정하는, 이분법만이 깡패 짓거리 하는 곳이 아니다.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온갖 것들 들판에서 노래하듯, 각각의 노래가 허용될 때 공명조는 훨훨 날게 된다. 이처럼 내가 공명조 전설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분열된 우리 사회가 부디 대승적 일심(一心)의 큰 ‘한 몸’을 함께 살려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일본 츠쿠바대(筑波大)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동양철학(양명학), 넓게는 동아시아철학사상문화비교이다.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며, 그림도 그리고, 문학·문화 평론 활동도 하고 있다. 
동경대, 하버드대, 북경대, 라이덴대에서 연구하였고,
한국양명학회장 및 한국일본사상사학회장을 지냈다.
현재 영남대 독도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상상의 불교학』,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이미지의 퇴계학』, 『언덕의 시학』 등 30여권이 있고,
논문으로는 「원효와 왕양명」 , 「릴케와 붓다」 등 200여 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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