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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민주화와 총장 직선제
대학 민주화와 총장 직선제
  • 교수신문
  • 승인 2020.01.2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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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인부산대 의학과 교수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
정영인
부산대 의학과 교수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

대학의 기원은 학문적인 관심과 지적 인식에의 의지를 지닌 교수와 학생들의 자치단체에서 유래한다. 본질적으로 대학은 스스로 강력히 독립을 지향하는 자율적 집단이다. 대학을 뜻하는 유니버스티도 자율적 공동체를 뜻한다. 자율적이란 자신이 설정한 규칙이나 법칙을 스스로 지키고 따르는 자기통제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다른 어떠한 권위에도 구속되지 않고 실천의 절대적 원리를 스스로 통찰하고, 그것에 따라서 자기의 행동을 스스로 규제해 가는 것이 자율의 참된 의미다. 

오랜 독재 치하에서 민주화 투쟁의 거점이었던 대학은 정부의 통제와 감시의 대상이었다.  특히 정부의 직접적 통제를 받는 국립대에서 총장 직선제는 대학 민주화의 표상이자 자율적 공동체의 최소한의 조건으로 여겨진다. 해서 민주화 투쟁의 산물인 총장 직선제는 대학 자율화의 상징으로서 선거 과정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대학이 지켜내야 할 소중한 자산으로 인식된다. 총장 직선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된 논거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초등학교 반장도 선거로 뽑는데 하물며 대학을 대표하는 총장을 직선으로 선출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총장 직선제를 대학 민주화의 본질적 요소로 여긴다. 

수년 전 필자의 대학에서 한 교수가 총장 직선제를 요구하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했다. 자살의 정당성을 떠나 그의 죽음은 대학 민주화를 이끌어내고 자율적 공동체를 수호한 의로운 행위로 지금까지 추모되고 있다. 엄혹했던 유신과 군부의 독재에 맞서다 타살 당한 교수는 있었어도 자살한 교수가 있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필자에게 그의 죽음은 남다른 의미를 남겼다. 과연 총장 직선제는 목숨까지 걸고 사수해야 할 대학 민주화와 자율의 본질적 요소일까? 대학에서 총장 직선제가 갖는 함의가 무엇이기에 투표권의 반영 비율을 두고 대학의 주체들 간에 갈등이 끊이지 않을까? 투표율이 90퍼센트를 넘을 정도로 총장 선거에 대한 교수들의 관심과 열기가 뜨거운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을 자율적 공동체로 규정할 때 자율에 내재된 함의적 측면에서 대학의 자율은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는 토대이자 버팀목이다. 학문의 자유 없이 대학의 자율을 구현하기란 실로 어렵고, 대학의 자율 없이 학문의 자유를 기대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학문의 자유는 학문하는 자의 양심과 책임에 의해서만 제한받으며 그 외의 모든 속박으로부터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이상을 지향한다. 대학의 자율은 바로 도덕적 내재화에 기초한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어야 한다.

총장 직선제는 대학 민주화를 위한 방편의 하나이지 대학 민주화를 구현하는 본질적 요소는 아니다. 도덕적 내재화 없이 자율의 미명으로 치러진 총장 직선제는 혼탁으로 점철되어 대학 스스로 외부의 간섭과 통제를 초래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으려는 의지와 지키려는 노력을 동시에 요구한다. 대학의 자율 역시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담보되어야 효과적으로 구현될 수 있다. 비록 대학 스스로 만든 제도나 규칙이라 할지라도 항상 그것이 갖는 구속성을 직시하고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구속성이 오히려 대학을 속박하여 자율을 침해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수없이 경험해왔다.

필자가 수차례 경험한 총장 직선제는 대학 자율화의 표상이라기보다는 대학 자유화의 타락이었다. 혼탁한 선거 행태는 양식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총장이 될 수 있는 진입 기회를 막는 역설을 낳았다. 다수의 선택이 민주화의 본령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선거를 통한 다수의 결정만으로 민주화가 구현되는 건 아니다. 다수의 결정이 때로는 민주의 탈을 쓰고 중장기적 문제 해결에 위험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은 어떤 사회보다도 개인의 자율성이 존중되어야 하는 곳이기에 선거를 통한 다수의 선택이 오히려 대학에 해악이 될 수 있다. 민주화가 정착된 서구의 명문 대학들에서 총장 직선제를 채택하고 있지 않는 것도 모름지기 이런 이유가 아닐까.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총장 직선제는 우리의 현실에 부적합하다. 총장에 부여된 과도한 사회적 명예와 권위는 선거를 과열시키는 요인이 된다. 대학의 도덕적 수준도 선거의 본래적 의미를 이해하고 따르기에는 현실적으로 미흡하다. 총장 직선제의 교육적 폐해가 결코 가볍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본질적 가치와는 무관한 총장의 선출 방법을 두고 벌이는 대학 주체들의 갈등에서 한국 대학의 후진성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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