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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 : 『運化와 근대』(박희병 지음, 돌베개 刊, 2003, 240쪽)
본격서평 : 『運化와 근대』(박희병 지음, 돌베개 刊, 2003, 240쪽)
  • 이현구 호서대
  • 승인 2003.10.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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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연구 비판 돋보인 최한기論…새로운 글쓰기 눈길

이현구 / 호서대·철학

20세기 후반에 들어 근대 서구적 이성에 대한 반성, 비판 혹은 도전의 양상이 여러 분야에서 전개됐다. 근대 이전의 사회 모형, 사고 구조도 이런 맥락에서 하나의 참조틀로 등장했다. 또한 비주체적으로 근대화한 동아시아 사회에서 동서문제가 다시 제기돼 자신의 문화 전통과 역사적 특성에 대해 재검토하는 분위기도 일어났다.

이런 맥락에서 최한기는 한국사상사에서 주목받을 만한 위치에 서 있다. 최근 출간된 '運化와 근대'는 이런 사정들과 긴밀히 연관된 저술로 보인다. 저자는 책의 앞머리에서 이 논저의 계기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정리해 뒀다.

'근대성찰적 접근법'으로 사유구조 조명
"최한기의 사상에는 오늘날 우리가 고민하는 여러 문제들, 이를테면 서양을 보는 눈의 문제, 주체성의 문제, 근대와 근대 극복(혹은 탈근대)의 문제, 리얼리즘과 아이디얼리즘의 문제, 유기체론과 기계론의 문제, 지배와 평화의 문제, 갈등과 대동(大同)의 문제, 자연과 문명의 문제, 실용주의와 인문적 가치의 문제 등등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최한기의 사상에 내재해 있는 이들 의제들은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 점에서 최한기의 시대는 우리의 시대와 이어져 있다."

이 책은 위에 제기한 각 항목들을 논문식 서술이 아니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서술 방식으로 저자의 생각을 잘 전달하고 있다. 저자는 "최한기에 대한 기왕의 연구는 대부분,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서구의 "근대주의적 전제 내지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최한기의 사상에서 근대성을 확인하는 데 급급하였다"고 평가하고 이러한 접근법에 대해 "근대성찰적 접근법"이라 이름붙인 나름의 방법론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이 방법론은 이 저술의 계기가 되는 문제 제기들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선택 때문에 자연히 이 책의 내용은 기존의 연구와 대비될 수 있는 특성을 가진다. 최한기 사상의 내적 구조나 체계를 정면으로 밝히기보다는 근대성찰의 틀을 통해 그것들이 드러나도록 하는 방식이 됐다고 하겠다. 또한 최한기 사상의 평가에서도 '역사적 맥락 속에서 내린 평가'와 '역사적 맥락에서 해방시켜 오늘날의 고민과 요청 속에서 내린 평가' 방식을 긴장 관계에 둠으로써 대체로 기존의 연구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평가를 내린 것과 다른 새로운 내용을 담을 수 있게 됐다.

작은 주제로 들어가서 보면, 실용주의와 인문적 가치를 대비하고 최한기의 사상을 실용주의에 치우치고 인문적 가치를 소홀히 한 사상으로 평가해 간 저자의 생각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타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저자가 최한기의 사상 특징이라고 짚어낸 내용들은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특히 개화사상과 최한기 사상을 연관지으려는 기존의 연구를 비판한 지은이의 주장은 논거가 매우 탄탄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개화사상과 최한기의 사상을 연관짓는 주장과 저자의 주장 사이에는 최한기 사상에 접근하는 관점의 뚜렷한 차이가 결론에 영향을 미친 것이고, 이 책에서 도달한 결론은 중국 근대 철학자 풍우란의 '추상 계승법'이 갖는 한계를 내포하지만, 최한기 이외의 근대 이전 사상가들과 비교할 때 그 위험성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근대와 탈근대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공자나 주자나 율곡을 참조틀로 가져오기보다는 최한기를 가져오는 것이 '인문학적 상상력'이 낳을 수 있는 비역사성의 문제를 완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다.

풍우란의 '추상 계승법' 한계 내포한 결론
최한기 사상 연구의 역사에서 이 책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최근까지 최한기 연구는 전문 연구자들의 산발적 작업이었다. 이런 상황이 낳은 문제점은 최한기가 사용한 주요 개념에 대한 암묵적 전제 위에 토론이 전개됨으로써 오히려 연구자의 입장은 불명료하게 되고 전공자 이외의 영역에서 함께 토론에 참여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혜강 최한기'(청계 刊, 2000)에서 인접 영역 전공자들이 함께 최한기를 다뤘으나 여기서도 이 문제는 제대로 해소되지 못했다. 이것은 논문이라는 형식의 글쓰기가 주는 제한이기도 했다. '운화와 근대'는 논문식 글쓰기의 틀을 버리고 지은이의 뚜렷한 문제의식으로 최한기의 사상을 해석함으로써 최한기 사상의 주요 개념들이 현재적 용어와 긴밀한 연관을 갖게 했다.

이런 작업은 앞으로 최한기에 관한 논의를 전공자 이외의 영역에서도 활발히 전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본다. 최한기 사상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다는 것은 기존의 연구에서 서로 상충하는 결론들이 아직 공존하고 있다는 상황에서 반증된다. '최한기 이기론에 있어서의 理의 위상'(최영진, 2000)이나 '기학의 이중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최진덕, 2000) 등의 논문에서 제기된 문제는 최한기 사상의 내적 구조에 대한 이해가 다양할 수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이런 편차가 발생하는 중요한 이유는 연구자의 관점과 접근 방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번에 나온 '운화와 근대'도 최한기 사상 이해에 다양성을 추가하면서 생산적인 의미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것으로 본다.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최한기 기학의 성립과 체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조선후기 철학이 기술 및 자연과학과 맺는 관계를 연구해왔다. 주요 논문으로 '근대로 나아가는 철학의 길', '최한기의 기학과 근대과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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