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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9 - 오스카 와일드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9 - 오스카 와일드
  • 교수신문
  • 승인 2020.03.06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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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

내가 싫어한 와일드

올해는 오스카 와일드가 죽은 지 120주년이 되는 해다. 그러니 그의 유일한 장편 소설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그동안 몇 번이나 영화화되고 최근에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듯이 올해에는 더 극성을 부릴지도 모르겠다. 특히 국외에서도, 국내에서도 소위 아름다운 남자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뮤지컬이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여성 팬들의 속물적 열광과 함께 우리를 유혹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뮤지컬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인 나는 와일드의 그것만은 일부러 피해 보지 않는다. 그 작품이 소위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연은 최고의 외모를 보여주는 가수들에게 환호하는 여성들에 의해 대량으로 판매되고 소비되기 때문이다. 섹스의 퇴폐를 비판한다는 미명의 작품이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로 대중들을 유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오랫동안 오스카 와일드를 싫어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에 읽은 동화 중에서 《행복한 왕자》를 비롯한 그의 동화를 가장 좋아했다. 극빈지대 초가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가난을 경험한 탓일까. 자신의 동상에서 보석들을 떼어내어 빈민에게 선물하는 《행복한 왕자》를 좋아했다. 그러나 동화가 아닌 그의 소설을 읽고 그의 인생을 알면서, 그의 모든 것이 싫어졌다. 내가 모리스를 좋아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대학시절 이후 죽을 때까지 넥타이를 매는 정장 차림을 한 적 없이 수염을 기르고 노동자처럼 살았다는 점인데, 와일드는 그런 모리스와 정반대로 현란한 색깔의 하늘색 넥타이에 여성복같이 폭넓은 비단 상의에 녹색 바지에 장발의 화려한 차림새를 즐겼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모리스는 아내가 처녀 적부터 사랑한 로세티와 결혼 후에도 만나게 했고, 심지어 한 때 세 사람이 한 집에서 살았을 정도의 서글픈 순애를 한 반면, 모리스는 결혼 후에 남자들과 추악한 성매매를 일삼아 결국 감옥에 갔다. 그것을 반인권적인 동성애 금지법에 의한 고귀한 희생이나 순교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포주가 소개한 나이 어린 하류층 남창 청소년들을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 함께 식사를 하고 값비싼 선물을 사주어 유혹한 뒤 호텔 방에 데려가 성관계를 맺고 돈을 주는 와일드의 매춘이 나는 싫었다. 어려서 내가 살았던 극빈지대는 집창촌이기도 해서 매일처럼 가련한 창녀들과 그들을 돈으로 사는 거친 남자들의 폭력을 보아야 했기에 그곳을 떠나는 것만이 내 유일한 소원이었다. 

대학에서 노동법을 공부하고 평생 노동법을 가르친 나는 매춘을 정당한 노동으로 합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오로지 향락으로 매춘을 즐기는 와일드와 같은 사람들을 지금도 싫어한다. 게다가 포스터가 쓴 소설 《모리스》에 나오는 카펜터의 동성애처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동성애가 아닌 동성애 매춘은 이성애 매춘만큼이나 싫었다. 오스카 와일드를 대표로 하는 유미주의자나 탐미주의자도 오랫동안 싫어했다.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와 목적으로 삼아 이를 추구하는 유미주의가, 한국에서 나온 유일한 와일드 연구서의 제목인 《오스카 와일드 데카당스와 섹슈얼리티》로 혼동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대표작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비롯하여 와일드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0년 전후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오가는 방황을 경험하면서,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와일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옷차림은 물론 매춘마저도 그가 살았던 빅토리아 영국에 대한 반항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고 부터였다. 앞에서 모리스를 다루면서 설명했듯이 르네상스 이래 소위 순수예술보다 낮은 것으로 취급된 공예를 19세기 후반부터 순수예술과 마찬가지의 예술로 승화시키는 노력을 하는 가운데, 모리스를 중심으로 한 미술공예운동(Art and Craft Movement)이 주로 건축이나 가구나 책 만들기 등에 치중한 반면, 와일드는 패션이나 의복에 관심을 가졌음을 알게 되면서 와일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모리스가 당대의 무미건조한 주택이나 가구에 반발했듯이 와일드는 당시의 권위주의적인 복식에 반항하여 댄디즘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패션을 추구할 수 있었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 반항이 모리스의 경우는 노타이로 나타났고 와일드의 경우는 화려한 넥타이로 나타났다면, 와일드의 그것은 사치나 퇴폐가 아니라 저항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일드의 매춘에 대해서는 아직도 긍정하지 못하지만 그의 댄디즘은 나름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와일드의 삶

1854년에 더블린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와일드는 더블린대학교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런던으로 이주하여 주로 거기에서 살다가 감옥에 갔다가 나온 후 추방되어 1900년에 프랑스 파리의 한 허름한 호텔에서 죽었다. 46년의 짧은 생애였다. 그런데 당시 더블린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수도였다. 그러니 우리 역사에 빗대어 보자면, 그는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태어나 경성제대와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동경에서 일본어로 작품을 쓰고 잘 살다가 중국의 슬럼가에서 죽은 것과 같았다. 우리가 36년간 일제 식민지를 경험한 것과 달리 수백 년 간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영국이란, 우리가 일본을 증오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증오의 대상인 점을 생각하면 와일드는 이광수 같은 반민족 작가들보다 훨씬 더 배척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일랜드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는 그가 이광수 등과 같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비판한 탓일지 모른다.   

와일드는 어려서부터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반발하고 독립을 지지했지만 직접 독립운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와일드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사랑은 자신을 자유 제단의 여사제로 본 그의 어머니에 의해 비롯된 것이었으나, 민족주의적인 그녀와 달리 그는 추악함과 고통과 강제가 없는 아름다운 삶을 창조하려고 노력했다. 옥스퍼드의 학생으로서 그는 그곳의 교수인 월터 페이터 등으로부터 유미주의를 배웠지만, 동시에 사상의 진보는 권위에 대항하는 개인주의의 주장이라는 사상을 가진 유토피안이라는 점에서 유미주의를 벗어났다. 어려서부터 강한 유토피아적 감각을 지닌 그는 유토피아를 포함하지 않는 세계지도는 잠깐이라도 들여다볼 가치가 없고, 인류가 그곳에 도착하면 다시 밖을 보고 더 나은 나라를 향해 항해를 떠나기 때문에 진보는 유토피아의 실현이라고 했다. 

와일드는 옥스퍼드를 떠난 후 20세에 <베라 또는 니힐리스트>(1880)라는 희곡을 썼다. 그는 그때부터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했지만 그 사회주의가 평준화가 아니라 인격의 개화를 뜻했다. 그 희곡의 주인공은 “좋은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귀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니힐리스트들은 고문과 계엄령을 싫어하고 결혼 폐지와 노동권 폐지를 요구한다. 와일드는 폭력을 싫어했지만, 그는 진정한 혁명가들, 즉 ‘바리게이트에서 죽는 기독교들’을 존경했다. 게다가 그는 모든 반란이 유익하다고 보았다. 역사책을 읽은 사람의 눈에는 불복종이 인간의 고유한 덕목이라고 했다. 와일드는 1894년 봄에 프랑스에서 행한 인터뷰에서 “나는 아나키스트 같은 존재라고 믿지만, 물론 다이너마이트를 던지는 짓은 정말 터무니없다.”고 했고, 1889년 초 카펜터가 편집한 노래책인 《노동의 찬가》 리뷰에서 아나키즘적 사회주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군주를 폭도와 분리할 필요는 없다. 모든 권위는 똑같이 나쁘다.”라고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와일드는 동성애를 이유로 1895년부터 2년간 투옥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젊은 남성들을 동성애 타락으로 인도한 변태로 비난했다. 언론은 이 사건에 열광했고, 대중들 사이에는 히스테리가 있었는데, 1890년대 빅토리아 시대 런던에는 2020년 한국에서와 같은 강렬한 동성애 혐오증이 존재했다. 비평가들은 동성애를 암시했다는 이유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비난했다. 감옥에서 그의 건강은 깨졌지만 정신은 깨지지 않았고, 그 경험은 사법제도와 정부에 대한 그의 분석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돌로 된 감옥만이 아니라, 열정의 감옥, 지성의 감옥, 도덕의 감옥, 그 밖의 다른 모든 감옥에 대해 썼다. 외부적이든 내부적이든 모든 한계는 감옥이라고 했다. 그 경험은 영어에서 가장 감동적인 시 중 하나인 《레딩 감옥의 노래》(1896)로 쓰였다. 

와일드와 더글라스 경

와일드의 아나키즘

와일드의 아나키즘 정서는 자유와 불복종에 대한 막연한 요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장자를 존경한 그는 “모든 국가의 방식은 잘못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자연 환경을 바꾸려고 하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다. 그들은 개인을 방해함으로써 가장 공격적인 형태의 이기주의를 생산하기 때문에 비도덕적이다. 그들은 교육을 전파하려고 하기 때문에 무지하고, 무정부상태를 일으키기 때문에 자기 파괴적이다.”라고 했다. 또한 부의 축적이 강력하고 부정직한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악의 근원이라고 확신한 그는 “자연의 질서는 휴식, 반복 및 평화다. 무기력과 전쟁은 자본을 기반으로 한 인공사회의 결과이며, 이 사회가 부유할수록 더 철저하게 파산한다.”고도 했다. 

평생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지지한 와일드는 카펜터처럼 모리스를 시인이자 책 디자이너로 존경했고, 크로포트킨을 비롯한 러시아 혁명가들을 함께 친구로 삼았다. 자유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주로 예술에 대한 관심과 아름다운 삶을 만들고자하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불충분한 표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즉 유미주의의 정치사회적 맥락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삶의 아름다움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와일드는 1886년 시카고의 헤이 마켓 사건 이후 체포된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사면을 위한 버나드 쇼의 청원서에 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서명했다. 

그는 국가가 없는 자유로운 사회에서만 예술가가 자신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 아나키스트였다. 와일드는 흔히 ‘예술을 위한 예술’의 주창자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그의 아나키즘 선언인 《사회주의적 인간의 영혼》에서 국가를 자발적 결합으로, 개인의 소유권을 재산의 공동소유로, 경쟁정신을 협동주의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고 나서 제기한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모든 형태의 권위를 부정하고 “예술가에게 가장 적합한 정부 형태는 모든 정부의 부재”라고 말했다. 

와일드는 유죄인 사회에 의한 살인자의 처벌이 더 잔혹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술이 본질적으로 파괴적이며 예술가는 기존의 도덕적 규범과 정치 제도에 반항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사유가 아닌 공유의 재산만이 개성을 번성시킬 수 있음을 보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내면적 충동을 따라가며 완벽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습관과 편견의 해체, 일상생활의 철저한 변화로만 가능해질 수 있다고 본 그는 예술과 사상을 삶의 중심에 두었고, 진정한 개인주의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발적인 공감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연극과 글에 있어 훌륭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넘쳐나는 창조적인 에너지로 여러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와일드의 아나키 사회주의는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의 모든 변종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이 되었다. 

와일드는 사회주의가 개인주의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가 권위주의라면, 즉 지금처럼 정치력과 함께 경제력을 가진 정부가 있다면, 다시 말해 산업적 폭정을 갖고 있다면, 인간의 마지막 상태는 첫 번째 국가보다 더 나빠질 것이다.” 그런 권위주의 사회주의는 단지 일부만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노예화라는 의미에서 거부되어야 한다고 와일드는 말했다.

와일드에 따르면, 모든 정부의 방식은 실패이며 모든 권위는 악이다. “그것은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악하게 하고, 그것이 행사되는 사람들을 악하게 한다.” 권위는 사람들에게 순응하도록 뇌물을 주면서 ‘매우 끔찍한 종류의 야만적인 행위’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그는 장자의 말, 즉 ‘인류를 혼자 내버려두는 것’에 동의하고 소로와 함께 “예술가에게 가장 적합한 정부는 전혀 정부가 아닌 형태”라고 결론짓는다. 그에 의하면 국가는 통치하는 대신 단순히 노동을 조직하고 필요한 상품의 제조와 유통에 책임이 있는 ‘자발적 협회’가 되어야 한다. 와일드는 인간의 조직인 모든 협회가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순응하지 않고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강조한 와일드는 니체처럼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구걸하는 것보다 뺏는 것이 더 좋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인주의자들과 달리 그는 사유재산이 개인의 독립성을 보장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유재산은 공공재산으로 전환되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물질적 안녕을 보장하기 위해 경쟁을 대신하는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유재산을 폐지하면 더 이상 결혼이 없을 것이고, 사랑은 더 아름답고 근사할 것이라고도 했다. 재산의 주요 원인을 근절한 후에도 남는 범죄는 보살핌과 친절에 의해 치유될 것이라고 본 와일드는 어떤 강박도 누구에게나 행사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자신의 일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폴리스 뉴스(1895.5.4.)에 실린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 관련 만평
폴리스 뉴스(1895.5.4.)에 실린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 관련 만평

평가와 영향

앞에서도 말했듯이 와일드는 식민지에서 태어나 제국에서 활약하며 제국의 도덕이나 관습에 저항하다가 감옥에 갇혔다가 병을 얻어 비참하게 죽었다. 그는 식민지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로서 순수한 켈트민족문화의 복구를 주장하거나 민족정신의 부활을 모색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지배당국인 제국에 충성하거나 그 제국의 문화를 찬양하지도 않고 도리어 그 제국문화의 본질인 빅토리아 부르주아 문화의 공리주의적 속물성을 철저히 풍자하고 비판했다. 그래서 근면은 모든 추악의 근원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그는 제국에도 식민지에도 속하지 않은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거나, 문화적 혼혈 또는 문화다원주의라고 하는 제3의 길을 추구한 코즈모폴리턴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의 국제주의는 단순히 범유럽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비잔틴, 아시아 심지어 러시아적인 것까지 포함하는 세계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문화다원주의의 선구자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그에게도 오리엔탈리즘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님은 주의해야 한다.   

와일드의 뿌리는 아일랜드 토착문화, 특히 전통 켈트의 신화와 구술전승문화 그리고 민중장식문화였다. 그는 아일랜드의 대기근 이후 미국으로 이민 간 4천만 명에서 7천만 명에까지 이른다는 아일랜드인들에게 그런 민족문화를 소개하면서 그들의 삶의 뿌리를 강조하면서도 미국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한 문화적 혼혈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러한 다원성은 와일드 개인의 다원성과도 관련되었다. 특히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자신을 개인주의자라는 측면의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한 점이 그러했다. 누구보다도 분열된 자아의 소유자로서 가장 보편적인 인격인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한 점은 19세기 후반의 예술가 중에서도 와일드의 가장 특징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다.  

와일드에 의하면 일체의 권위가 없는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 입법자는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개인인 예술가의 정신에 따라야 한다. 그런 주장을 한 와일드는 같은 시대에 민중을 예술 창조의 궁극적인 심판자로 본 톨스토이와 대립했다. 와일드에 의하면 예술은 예술가 개인의 작품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그는 “시대가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시대를 만든다,” “예술은 세계가 과거에 알지 못한, 개인주의의 가장 충실한 형식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예술은 민중적일 수가 없고, 민중이 예술의 심판자일 수 없다. 나는 이 점이 와일드의 한계라고 본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한국에서 와일드는 여전히 데카당스와 섹슈얼리티이고 섹시한 미남자를 좋아하는 여성들의 유미주의적인 대량 소비품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는 아나키스트로 민중예술인 공예를 고급예술 이상의 가치를 갖는 것으로 높인 모리스의 후예로 그 예술의 정점은 장식예술이라는 점이 한국에서는 그의 사후 120년, 생후 166년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그 장식예술론은 그의 조국인 아일랜드와 관련되었음도 모른다. 이처럼 천박한 대중예술이 엘리트주의적인 고급예술과 야합하여 와일드를 철저히 모독하는 곳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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