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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 ―어느 노동자 화가가 꿈꾼 세상(4)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 ―어느 노동자 화가가 꿈꾼 세상(4)
  • 교수신문
  • 승인 2020.04.16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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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박홍규 명예교수(좌)와 최재목 교수(우)
영남대학교 박홍규 명예교수(좌)와 최재목 교수(우)

<2편에 이어>

: 노동을 주제로 이야기하기 전에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내막을 잠깐 언급을 하자면, 빈센트는 초등학교 중학교 과정을 한 4년 정도 마치고 16살 정도에 큰아버지가 경영하는 화랑에 그림 직원으로 이제 들어갔습니다. 구필화랑이라는 곳인데 거기서 제일 처음에는 헤이그에서 근무를 했다가 네덜란드, 그 다음에 이제 또 몇 년 뒤에 런던에 가서 근무를 하는 중에 아까 말한 첫 짝사랑 하숙집 사랑의 실패가 있었고. 그래서 또 그림을 파는, 그러니까 화랑이라는 곳이 화구와 그림을 팔거든요,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화랑이라 하면 주로 전시를 하는 곳이나 미술작품을 파는 곳이라 생각을 합니다만. 여기 구필 화랑은 화구를 파는, 특히 판화 같은 것도 파는 곳이었는데, 빈센트가 주로 돈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비싼 그림, 좀 사치스런 그림을 파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화랑 생활을 청산하고 서점 직원도 하고 교회 임시목사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하다가 결국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될 생각이었는데, 시험도 떨어지고. 그래서 사실 빈센트는 20대 후반이 되기까지 실업자였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루저였죠. 어떤 직업도 적응을 하지 못하고 하는 일마다 실패를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마지막에 목사가 되지도 못하고, 임시 전도사보다도 못한 그런 무급의 월급도 받지 못하는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 보리나주라고 하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 브뤼셀 부근이죠?
: 네. 브뤼셀 부근의 탄광지역인데. 지금은 이제 탄광지대가 아니고 관광지 비슷하게 변했습니다만, 19세기 후반만 하더라도 보리나주라고 하는 곳이 유럽에서 가장 노동 조건이 열악한 광산에 폭발이 터지면 사람들이 막 죽고 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60-70년대에 강원도에 탄광이라고 하는 곳은 막장 인생들의 마지막 피난처다, 피난 가는 곳이다 이런 식의 말이 있을 정도로 험악한 곳이었습니다. 빈센트는 이제 거기에 가게 됩니다. 거기서 한 1년 정도 임시 전도사 생활을 하게 되는데, 자기도 월급 한 푼 못 받으면서 겨우 동생이 보내주는 돈으로 먹고 살면서도, 자기보다 더 못한 광부들 그 가족을 보면서 자기가 입는 옷이나 이런 거 다 벗어주고 자기가 먹는 빵 같은 것도 막 나눠주고 합니다. 한번은 교회 당국에서 보리나주에 시찰을 왔다가 전도사 빈센트가 거의 뭐 거지처럼 자기가 입고 먹는 것들을 광부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보고서 감동하기는커녕 오히려 전도사인 그가 이렇게 헐벗고 사느냐면서 해임을 하고 맙니다. 그 당시 그렇게 살면서 나이 26, 7세 때 처음으로, 당시 보리나주 광부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게 빈센트가 그린 첫 번 째 그림입니다. 이렇게 빈센트는 미술대학, 미술학원은커녕 초중고에서 그림 한번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광부들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럽게 보였고, 또한 광부들의 삶을 그림으로 그려준다거나 사진으로 찍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빈센트 자신만은 그래도 이 사람들의 고통스런 삶을 그림으로 남겨야겠다고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리게 된 거죠. 
최재목 교수님은 시인이시니까 아시겠지만. 마치 마리아 릴케가 시를 쓸 때의 어떤 절박한 계기, 그야말로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고통스럽고 삶의 어떤 절박한 계기가 있어야만 참된 시가 쓰여진다고 했듯이, 빈센트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무슨 그림에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그린 것도 아니고, 그림을 그려서 이름을 떨치고 싶은 욕망이 있어서 그린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자신이 살다보니 이런저런 직장을 거치면서 처절함을 느꼈고, 빈센트는 이때부터 자살하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거의 마지막 인생의 종점이라고 생각한 곳의 막장 인생. 그런 현장에 와서 자신이 바라본 비참한 삶을 아주 절실하게 표현하고 싶다는 것. 거기 사람들의 삶을 그려보고 싶다는 절실한 갈망. 이런 것을 그린 그림이죠.

: 예 여기 글을 잠깐 1879년 편지죠.
: 네, 맞습니다.
: 우리 나이로 26세 때 일인데, 여기 보면 “이곳사람들은 완전 무학 문맹이고, 대부분 글을 읽지 못하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힘겨운 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고, 기민하며 용감하고 솔직해. 체격은 작아도 각진 어깨를 가지고 있고, 우수에 잠긴 깊은 눈이 있어. 그들은 많은 일에 뛰어나고 정말 엄청나게 열심히 일을 해.” 그러면 여기는 주로 벨기에 사람들인가요? 네덜란드 사람들도 섞여 있는 건가요?
: 접경이죠. 뭐 여기저기 사람들 섞여 있겠죠,
: 제가 네덜란드에 가서 보니까 여성들도 우리보다 덩치가 더 크고 키도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성들이 저렇게 등이 굽을 정도로 석탄을 캐서 옮기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안쓰럽기도 하고. 물론 빈센트도 이런 등짐을 져본 경험이 있었겠죠? 
: 그렇죠. 빈센트도 어릴 때 그런 경험이 있었죠.
: 우리 학생들도 학비를 마련하러 알바로 공사장 경험을 하는 것처럼 빈센트도 젊은 시절에 무진장 고생을 한 거네요. 이제 그 다음으로 넘어가보겠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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