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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철주의 미술놀이 '외화내빈(外華內彬)' 1] 신윤복 미인도
[손철주의 미술놀이 '외화내빈(外華內彬)' 1] 신윤복 미인도
  • 교수신문
  • 승인 2020.04.1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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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미인도의 알짬은 '시선의 오묘함', 언어도단의 눈빛
'말길이 끊어진 곳에서 비로소 꽃피는 무한한 아름다움'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1863년, 캔버스에 유채, 214×269㎝, 오르세 미술관 소장. 누드로 나선 뫼랑 바로 곁은 마네의 아우이고, 오른쪽은 마네의 매부이다. 화가는 당대의 ‘보는 방식’에 주먹질한다.

‘척추동물 문(門) 포유 강(綱) 영장 목(目) 사람 과(科)’라면 미인 보기를 다 좋아한다. 요컨대, 미인은 눈길을 잡아끈다. 동서고금의 글쟁이치고 미인의 생김새를 묘사하지 않은 채 세상을 뜬 인사는 드물다. 개중에 서쪽 바다 건너 사는 이들은 숫제 신체 부위를 토막 내면서 미인의 조건을 늘어놓는다. 이를테면 ‘삼장(長)삼단(短), 삼광(廣)삼협(狹), 삼후(厚)삼박(薄)’ 같은 언급이다. 어느 세 군데는 길거나 짧아야 하고, 어디는 넓거나 좁아야 하고, 또 어디는 두텁거나 얇아야 한다는 식이다. 양인들의 분류는 입방정을 넘어 샤일록의 벼린 칼마냥 으스스하다.

우리 쪽은 어떤가. 들으면 매양 웃음이 난다. ‘시경’에 나오는 구절이 이렇다. ‘손은 새싹처럼 부드럽고, 피부는 기름처럼 매끄럽고, 목은 나무굼벵이처럼 하얗고, 치아는 박 씨처럼 고르고, 이마는 매미처럼 너르고, 눈썹은 누에나방처럼 길고…’ 미인을 떠올리는 말 쓰임새부터 새실새실 웃도록 만드는 동양의 순박성이 이토록 낙낙하다. 어디 마음 씀씀이뿐일까. 옛 그림에 나오는 미인은 하나같이 넓은 볼에 살이 도톰하게 올랐다. 이른바 ‘후육미(厚肉美)’를 높이 쳤는데, 요샛말로 바꾸면 너그럽고 시원시원한 너름새다.

긴가민가한 분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여인을 떠올려보라. 그 모양새에 늘품성이 가득하다. 쌍영총 안주인의 얼굴은 호빵처럼 둥글고, 각저총의 여인은 펑퍼짐한 얼굴이다. 좀 갸름하다 싶은 얼굴이 장천 1호분에 보이지만 폭이 한 뼘은 족히 넘는다. 벽화의 얼굴은 아마 본 대로, 생긴 대로, 바라는 대로 그렸을 테다. 얼굴도 마음도 크고 둥글어야 한다는 소망이 ‘원만(圓滿)’을 기리는 그네들의 보편적 심성에 들어맞았다. 애오라지 보름달 같은 아름다움이 얼굴에 새겨졌다는 거다. ‘아름다울 미(美)’ 자가 오죽하면 ‘살찐(大) 양(羊)’에서 나왔겠는가. ‘달덩이 미인’은 그러나 고릿적 얘기다. 요즘 여성에게 그 말은 안 하는 게 좋다.

조선 시대에 변변한 ‘미인도’ 몇 점 남은 게 없다니, 참 아연한 노릇이다. 입만 떼면 ‘산 좋고 물 맑은’ 고을이라 했거늘 그 터전에 미인이 느닷없이 사라졌을 리는 만무하다. 대답은 뻔하다. 그리려는 화가가 애당초 드물었다. 아니, 그리게 내버려 두지 않는 풍속이 엄존했다. 점잖은 터수에 여인 모색이 어떠니 입에 올리면 상스럽다며 자발스럽다며 몰매 맞았다.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 숨통이 좀 트인다. 단원 김홍도가 나오고 혜원 신윤복이 뒤를 잇고 하면서 미인의 자색을 요량해볼 그림이 가물에 콩 나듯 고개를 내밀었다. 단원과 혜원은 조선 미술계에 넝쿨째 굴러든 홍복일시 분명타.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에 등장한 18세기 미인은 ‘헉’ 소리가 난다. 이유는 딱 하나. 대륙의 화가들이 거의 천 년간 ‘보기 좋은 객체’만 끄적거리고 있을 때, 그들 땅의 백 분의 일 밖에 안 되는 반도의 혜원이 냉큼 ‘알고 싶은 주체’를 묘사해냈기 때문이다. 유가가 지배하는 깜깜 어둠 조선조에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화가가 혜원이었다. 하여 그를 ‘화단 최고의 뇌섹남’이라고 불러도 ‘국뽕’이 아니다.

신윤복의 명작 ‘미인도’를 추어올리려다 앞말이 지루해졌다. ‘미인도’의 알짬이 과연 무엇인가. 나는 ‘시선의 오묘함’이라고 못 박는다. 남들은 이 미인을 왜 아름답다 말하는가. 탐스럽게 멍울진 얹은머리 때문인가, 짧아서 아찔한 저고리의 도련 때문인가. 나는 아니라 한다. 어깨와 팔뚝 선이 드러나는 스키니한 소매와 부풀도록 부푼 열두 폭 치마 때문인가. 역시 아니다. 쪽빛 아랫단 사이로 내보인 외씨버선도, 겨드랑이에서 흘러내린 주홍색 속고름도, 고를 매지 않은 진자줏빛 두 가닥 고름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무굼벵이 같은 목과 매미 같은 이마에, 덧붙여 앵두 같은 입술과 복사꽃빛으로 물드는 볼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올시다’다. 답은 앳된 얼굴에 떠오른 저 요령부득, 언어도단의 눈빛이어야 마땅하다.

내 강변을 따지기 전에 서양화 한 점을 어서 보자. 에두아르 마네의 문제작 ‘풀밭 위의 점심’은 다들 아실 것이다. “이 무슨 해괴한 장난이며, 음란한 짓거리이며, 추잡한 수작인가?” 이 그림을 보자마자 나폴레옹 3세의 황후가 부채로 캔버스를 후려치면서 내뱉은 괴성이 바로 그랬다. 음란하다니? 대명천지, 그것도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裏)에 벌거벗어서 눈꼴 시렸던가? 나체의 여인이 욕바가지를 뒤집어쓴 까닭은 딴 데 있었다. 뻣뻣이 맞받아치는 ‘시선’이 원흉이었다. 그림 속 여인은 마네의 단짝 모델인 빅토린 뫼랑이다. 붉은빛 도는 금발의 뫼랑은 호리한 몸매에 세련된 파리지엔느였다. 그 뫼랑이, 그녀를 쳐다보는 우리를 당돌한 시선으로 되받는다. 그 시절 누드는 시선을 다른 곳에 두는 게 관례였다. 관객이 모델 몰래 죄의식 없이, 찬찬히 훑어보라는 ‘배려’였다. 뫼랑의 응시는 강다짐하듯 덤벼든다. 이 눈빛에서 사달이 났다. 마네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내락(內諾)이 된 포즈를 보란 듯 뒤집어버린 것이다.

마네의 뻔뻔스러움은 이어졌다. ‘올랭피아’로 관객의 화에 불을 지폈다. 티치아노의 비너스를 본뜬 이 걸작에서는 한술 더 떠 모델인 뫼랑이 매춘부 역할을 한다. 신화 속 비너스도 아닌 매춘부가 눈 빤히 뜨고 관객을 살핀다. 살롱 전에 걸린 ‘올랭피아’를 보던 관객들이 박살 내려고 덤비는 바람에 관리인이 작품 앞을 지켰다는 후일담이 여태 남았다. 눈 똑바로 뜬 응시는 타인의 평정심을 뒤흔든다. 상대를 포승도 없이 묶어버린다. 당대의 위선에 어퍼컷을 먹이는 마네의 미술사적 책략은 저 도발하는 시선으로 완수했다.

신윤복, ‘미인도’, 18세기, 비단에 채색, 114×45.5㎝,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도무지 알기 어려운 미인의 속내를 화가 신윤복은 ‘가슴 속에 품은 만 가지 춘정’이라고 그림 속에 적어놓았다.
신윤복, ‘미인도’, 18세기, 비단에 채색, 114×45.5㎝,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도무지 알기 어려운 미인의 속내를 화가 신윤복은 ‘가슴 속에 품은 만 가지 춘정’이라고 그림 속에 적어놓았다.

다시 혜원의 ‘미인도’로 돌아간다. 이 여인은 다빈치의 ‘모나리자’ 같은 미소가 없다. 미소는 91.4m 밖에서도 식별할 수 있다는 조사가 있다. 그만큼 강렬한 우호적 신호다. 혜원은 사람을 깔축없이 사로잡을 그 가성비 높은 심리적 기제를 미인도에 넣지 않았다. 웃음기를 싹 빼버린 미인이다. 다음으로, 눈은 찬찬히 유심히 보자. 식상한 비유지만, 눈은 영혼의 대변인이다. 세상 누구에게도 통용되는 유일한 언어가 눈빛이랬다. 이 미인, 남을 안 본다! 그렇다고 우두망찰하는 눈초리도 아니다. 무어라 불러야 알맞을 눈빛일까.

그녀에게 도발 운운하는 것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어불성설이다. 아양을 떨 깜냥이나 불현듯 욕망을 선동하는 교태는 일찌감치 버렸다. 다 좋은데, 옷 벗는 듯한 저 자태는 또 뭐냐는, 울뚝밸 섞인 반론이 혹 나올 수는 있겠다. 두 번 세 번 보면 깨닫게 된다. 저 눈빛이 무슨 제삼자의 관음을 의식하거나 수용하는 본보기란 말인가. 잠깐, ‘미인도’ 하나를 더 소환하자.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한 조선 시대 작자 미상 ‘미인도’도 관객과 어긋나는 시선이다. 대신 야릇하게 웃는다. 한 손에 꽃도 들었다. 허리를 살그머니 비틀고 ‘얼짱’ 각도를 과시한다. 상대를 호리고자 하는 속셈이 눈매와 입매에 똬리 틀고 있음을 들켰기에 혜원 그림에 비해 너끈히 두어 수는 접힌다.

혜원 ‘미인도’의 미인은 미색이라는 자의식이 손톱만큼도 없다. 시선 처리가 참으로 시크하다.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화장품이라는 ‘미소’ 한 톨 없이 그녀는 보는 이를 맘 졸이게 한다. 색정 넘치는 표정도, 팜 파탈의 뻔한 시늉도, 그녀는 부러 연출하지 않는다. 있다면, 요설을 즐기는 외국 어느 품평가의 말처럼 ‘러블리(lovely)와 론리(lonely)를 나누는 가느다란 선(線)’이 있을 따름. 혜원의 모델은 수동적 객체라는 회화 전통의 강제를 넘어서려는 실존과 자각을 애달프게, 가녀리게 드러낸다. 그녀는 우리를 결코 보지 않으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녀를 기어코 보게 만든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내경(內境)으로 침잠해가는 저 명상적 시선의 오묘한 힘 덕분이다. 보는 이를 멱살 잡지 않고 여심 깊숙이 끌어들여 공손히 조아리게 하는 혜원의 붓질이 환상적이다.

애써 아름다움을 구한다고 아름다움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회남자’에 씌어있다. 어디서 아름다움을 얻을까. 고려 문인 최해는 시로 귀띔한다. ‘천연의 무한한 아름다움은(天然無限美)/ 아직 꾸미기 전에 다 있구려(摠在未粧時)’ 여간해서 속을 털어놓지 않을 혜원 ‘미인도’가 거든다. ‘말길이 끊어진 곳에서 아름다움은 비로소 꽃핀다.’

손철주 미술평론가
국민일보 기자, 학고재 주간 등을 지냈다. 교양미술서 베스트셀러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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