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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유럽이 중국보다 미국에 더 실망한 이유
[대학정론] 유럽이 중국보다 미국에 더 실망한 이유
  • 교수신문
  • 승인 2020.05.27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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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을 보는 유럽인의 생각이 움직이고 있다. 세계질서에 변화가 생길 수 있는 조짐이라고 할까. 최근 독일·영국·프랑스에서 잇달아 나온 여론조사 결과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먼저 독일 쾨르버재단이 지난주 발표한 독일인 상대 조사를 보자. 응답자의 73%가 팬데믹을 거치면서 미국을 보는 시각이 나빠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시각이 나빠졌다는 대답은 미국의 절반 수준인 36%였다. 이에 따라 ‘미국과 중국 중 어디가 더 독일에게 중요한가’에 대한 응답은 미국 37%, 중국 36%로 비슷하게 나왔다. 작년 9월 조사에서는 ‘미국이 중요’가 50%, ‘중국이 중요’가 24%로 미국이 두 배나 높았다.

이런 내용을 보면 독일에서 중국에 대한 신뢰도가 꽤 호전됐다고 느낄 수 있겠다. 하지만 동일한 조사의 ‘중국정부가 좀 더 투명성을 유지했다면 코로나 팬데믹을 완화하거나 피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느냐’는 설문에는 71%(완전 동의 43%, 어느 정도 동의 28%)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영국 싱크탱그 브리티시포린폴리시그룹(BFPG)의 최신 여론조사에서는 ‘중국이 국제적으로 책임 있게 행동할 것으로 믿느냐’는 질문에 영국인 응답자의 83%가 불신 의사를 드러냈다. 이란(85%), 북한(88%)과 비슷한 수준이다. 유럽에서 중국공산당에 대한 믿음이 여전히 낮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쾨르버재단의 조사 결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유럽인들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공유한 미국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실망도 더 쉽게 한다. 따라서 중국에 우호적인 여론조사 결과가 곧 유럽의 미·중 간 등거리 외교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미국 싱크탱크 독일마샬펀드의 객원연구원 노아 바킨은 최근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에 기고한 글에서 이런 견해를 제시했다. 코로나19 초기 미국이 EU발 미국 방문을 전격 금지했던 건 유럽의 미국에 대한 기대와 관련된 좋은 사례다. 당시 미국은 EU 측과 상호 협의는 물론 사전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EU는 이로 인해 엄청난 쇼크를 먹었다.

그렇지만 미국에 상대적으로 엄격한 잣대를 감안하더라도 코로나 사태로 인해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급락한 건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BFPG 조사를 보면 영국인 응답자 중 단지 28%만 미국이 국제적으로 책임 있게 행동할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지난 1월 조사에서 똑같이 대답한 비율(41%)에 비해 13%포인트나 빠졌다. 프랑스 Ifop폴링그룹이 이달 들어 프랑스인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앞으로 10년 동안 맞닥뜨릴 도전에 어느 나라가 가장 잘 대응할까’라고 물은 게 있다. 놀랍게도 고작 3%만 미국을 선택했다.

이상의 상황을 정리하면 ‘중국을 신뢰하긴 어렵지만 중국에 실망한 정도는 미국보단 덜 하다’가 된다. 즉 미국은 위기관리 능력 부족에다 ‘아메리카 퍼스트’의 추한 이면을 드러냈고 중국의 경우 권위주의 체제 아래 잠복해 있던 문제들이 여지없이 까발려졌다. 이러한 국면에서 워싱턴이 ‘중국 책임론’ 공세에 나서자 베이징은 ‘미국 음로론’으로 맞선다. 급기야 워싱턴에서는 조지 케넌이 70여년 전 들고 나왔던 봉쇄정책의 뉴 버전을 거론하고 있다. 케빈 러드 전 호주 총리는 코로나 이후 미·중의 힘이 약화되면서 ‘국제질서의 무정부상태’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이럴 경우 지역적 헤게모니가 등장하는 세계가 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정원교 성균관대 초빙교수.
정원교 성균관대 초빙교수.

나는 코로나 사태와 미·중 간 새로운 냉전 앞에서 우리 사회가, 특히 정치권이 다음 두 가지를 되뇌기를 바라고 있다. 첫째, 개인의 자유와 시장의 기능을 앞세우더라도 공공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는 안 되겠다. 사회적 재난을 극복한답시고 통제와 감시를 수단으로 내세우는 감시 사회도 안 되겠다. 둘째, 세계질서의 변화를 잘 살피면서 북한과 신뢰를 쌓아나가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어야겠다. 그리하여 다음 세대나 다다음 세대는 안보든 경제든 미·중 두 나라 눈치 좀 덜 보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런 일들은 쉽게 이뤄지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하지 않는다면 누가 대신해 주겠는가.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한반도를 다른 곳으로 옮겨 놓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정원교, 성균관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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