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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3] 헌법 정치는 부르주아 지배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3] 헌법 정치는 부르주아 지배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 박홍규
  • 승인 2020.07.27 14: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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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동3

노동과 평등에 바탕을 둔 ‘자연적인’ 경제 주장
인간이 편안히 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선언하기도

센느구 국회의원 때는 부채와 임대료에 대한
부분적인 모라토리엄 요구, 사회적 문제 제기
경제적 모순의 체계, 또는 빈곤의 철학(1846년판)

프루동이 1846년에 낸 《경제적 모순 체계, 또는 빈곤의 철학》(이하, 경제적 모순) 두 권은 ‘신은 악마’이고, ‘사람이 제단 앞에 절하는 한 인류는 저주받을 것이고 왕과 사제의 노예일 것’이라고 하면서 정부와 재산에 대한 그의 쌍둥이 맹공격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모든 형태의 정치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독재 정치보다는 나은 반면, 헌법 정치는 불안정한 경향을 보이며 부르주아 지배의 도구가 되거나 독재 정권으로 전락할 수 있다. 심지어 직접적인 민주주의도 수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종 그들 자신의 결정을 실행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것은 시민들을 억압하는 데 정당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독재 정치보다 더 나쁠 수 있다. 공산주의에 관해서 프루동은 특히 다음과 같이 무시했다. 일반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은 국가 권력에 대한 광신도라는 이상한 착각에 빠져 있다. 그들은 보상 조치들로 인해 집단적 부를 창출한 노동자들의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 권위를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치 개인은 사회를 거쳐서 존재하게 되고, 개인을 따라 사회가 아닌 것처럼.

놀랄 것도 없이, 《경제적 모순》은 프루동에게 우파와 좌파로부터 더 많은 악명과 적의를 가져왔다. 긍정적인 측면으로, 프루동은 그의 상호주의에 대한 경제 체계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것은 ‘사유 재산과 집단 소유에 대한 관념의 합성’이 되고, 두 가지 모두의 폐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유방임주의와 국가 통제 대신에 그는 교류와 신용에 기반을 둔 일종의 사회주의인 노동과 평등에 바탕을 둔 ‘자연적인’ 경제를 내세웠다. 가치 노동 이론을 수용하면서, 그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 산물을 교환하기 위해 협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가치는 관련된 필요한 노동 시간의 양에 의해 계산될 것이다. 

그는 후에 자신의 상호주의 체계를 노동과 연대라는 과제에 적용하는 ‘보복의 법칙,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목숨에는 목숨’이라고 묘사했다. 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 생산 수단을 통제할 것이다. 그들은 특히 제조업과 추출 산업에서 큰 조합뿐만 아니라 소규모 조합을 형성할 것이다. 상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경제조직은 정치적 조직을 대체하게 되고 국가는 결국 쇠퇴하게 될 것이다. 이 체제에서 ‘노동자는 더 이상 공동체의 바다에 시달리는 국가의 농노가 아니다. 그는 자유인이며,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서, 자기 주도적으로 행동하고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사람들이 한 가지 공통된 수준에 도달하기 시작하면서, 사회적 화합이 만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평등의 상태는 아닐 것이다. 근면함은 게으른 자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루동은 게으름을 악덕으로 여기고 노동 자체를 미덕으로 보는 청교도적 성향이 강했다. ‘인간이 편안히 사는 것은 좋지 않다’고 그는 선언했다. 그는 또한 가난이 깨끗하고 건강하다고 칭찬했다. ‘복음서에서 가난을 미화한 것은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설교한 가장 위대한 진리’라고 한 프루동이 말한 검소함의 긍정적인 측면은 사람들이 그들의 필요를 제한하고 소박한 삶을 산다면 자연은 모두에게 충분한 것을 제공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더 이상 사치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지 않았다. 그는 소비되는 것보다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가 있다는 의미에서 풍요가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주위에서 공평하게 확산된다면 상호주의적인 계획에 풍요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윽고 프루동은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길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1847년 파리에서 살기 위해 이주했고, 1년 후 혁명이 일어나 루이 필립의 왕정이 전복되었다. 그것이 ‘생각 없이 만들어진 혁명’이라는 점을 우려한 프루동은 투쟁에 몸을 던졌다. 그는 많은 인기 있는 클럽에서 연설했고 1848년 2월에 <인민>(Le people)지를 발행했는데 부수가 4만 부까지 치솟았다. 검열관에 의해 폐쇄된 그것은 다른 이름으로 세 번 부활되었다. 

프루동이 발행한 인민(Le peuple)지

1848년 11월에 현대산업의 ‘자기 관리’ 측면을 예상하는 상호주의 선언문을 발표한 푸르동은 재산과 가족을 지키면서 ‘노동의 열매, 고리대금 없는 재산의 자유로운 처분’을 요구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타인의 자유에 관한 예외와 함께 모든 인간과 시민의 무한한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사상과 언론의 자유, 노동의 자유, 상업과 산업의 자유, 교육의 자유, 한마디로 절대적 자유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프루동은 당시 의회 정치로 잠깐 나아갔다. 1848년 6월 센느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가을 대선에서는 좌파 후보인 라스파일(Raspail)을 지지하였다. 자신의 원칙에 따라 그는 제2공화국의 새로운 헌법이 더 이상의 발전을 방해하는 헌법이라는 이유만으로 반대표를 던졌다. 그는 부채와 임대료에 대한 부분적인 모라토리엄을 요구하면서 정치적 이슈에 앞서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려 했다. 그것은 모두 그가 세입 없이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줄이기 위한 계획의 일부였다. 

그러나 그 제안은 의회에서 큰 소동을 일으켰다. 그는 의원들에게 ‘우리 자신이 거절할 경우 당신 없이 청산 절차를 밟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자, ‘우리라고 말할 때 나는 프롤레타리아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리고 내가 당신이라고 말할 때 나는 당신을 부르주아 계급과 동일시한다’고 선언했다. 그의 말에 소름 끼친 의원들은 “사회전쟁이다!”고 울부짖으며 그의 동의안을 691대 2로 부결시켰다.

그의 의회 경험은 행복하지 않았고 그것은 단지 정치 변화보다 경제 개혁이 더 중요하다는 그의 믿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보통선거권이 반혁명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의회를 통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프루동은 경제의 상호주의 변혁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 무료 신용을 갖춘 인민은행을 설립하려고 노력했다. 그 사업은 동등한 금액의 상품 교환과 무이자 대출의 발행으로 제한될 예정이었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력과 생산에 소요되는 비용의 합계에 기초할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변화를 위한 합의된 전략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같은 이익을 공유하는 소규모 사업가와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혜택을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자본주의의 원동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프루동은 경쟁이 ‘교류의 향신료, 노동의 소금’이라고 계속해서 믿었다. 경쟁을 억제하는 것은 자유 그 자체를 억압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인민은행의 실효성은 2만 7천 명의 회원을 가까스로 모집했지만 1년 안에 무너졌다. 

대통령인 루이 나폴레옹을 공격한 탓에 1849년 3년의 금고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아 벨기에로 일시 망명했으나 곧 돌아와 구속되었다. 당시의 정치범은 오늘의 한국에서와는 달리 집필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잡지의 편집과 발간도 가능했다. 옥중에서 《19세기 혁명의 일반 이념(Idée générale de la révolution au XIXe siècle)》(1851)을 써서 출판하고 재봉사와 결혼했으며, 면회는 물론 외출도 허용 받아 아이도 낳았다. 성 문제에 대해서는 지극히 보수적이어서 당시에 유행한 자유연애에 반대했고 평생 모범적인 남편과 아버지로 살았다. 

《19세기 혁명의 일반 이념》에서 파괴적인 폭력혁명 대신 건설적인 평화혁명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 프루동을 마르크스는 물론 바쿠닌과도 구별하게 하는 특징이다. 그는 혁명의 평화적 달성을 방해하는 것으로 부와 권력과 전통, 그리고 빈곤과 무질서와 무지를 들었다. 프랑스 대혁명을 왕정에 의한 1인 독재에서 민주정에 의한 다수의 독재로 전환한 것에 불과하고, 정치제도에 대한 혁명은 이루어졌으나 재산제도에는 손을 대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비판한 프루동에게 프랑스 대혁명은 결코 ‘혁명’이 아니며, 그것은 한 인간의 주권(전체주의)에 대신하여 다수의 인간의 주권(민주주의)을 세운 데 지나지 않고, 양자는 모두 타자에 대한 의지의 강제라는 점에서 원리상 아무런 변화도 없으며, 모두 비난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1858년, 프루동은 《혁명과 교회의 정의에 관하여(De la justice dans la révolution et dans l'Eglise)》를 출판했으나 곧 압수당했고 ‘공중도덕, 종교 및 국가’에 대한 죄로 3년의 금고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다시 벨기에로 망명하여 1862년 프랑스 정부가 특사를 내릴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861년 이탈리아 전쟁을 계기로 《전쟁과 평화(La Guerre et la Paix)》를 쓴 프루동은 “군국주의의 종언이야말로 19세기의 사명”이며 민족주의는 정치적 자유, 경제적 정의, 사회 개혁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여 친구인 게르첸과 결별했다. 프루동은 마치니나 가리발디가 추구한 이탈리아 통일은 국내적으로는 전제정치, 국제적으로는 균형 파괴를 초래한다고 비판하고, 다수의 소규모 정치적 단위로 나누어진 이탈리아야말로 자신의 연방주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 최적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 책으로 인하여 벨기에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샀다.

1862년 파리로 돌아온 프루동은 1863년에는 《연방주의적 원리와 혁명당 재건의 필요에 관하여(Du principe Fédératif)》를 써서 아나키즘을 경제적 영역으로부터 세계 사회 전반으로 확대하고자 했고, 연방이야말로 정치적 민족주의를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 그는 정치적 질서가 권위와 자유라고 하는 대립 원리에 의해 성립한다고 하면서, ‘권위적인 제도’는 ‘개인에 의한 만인의 통치’(군주제나 족장제)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통치’(공산주의)로, ‘자유로운 제도’는 ‘각자에 의한 만인의 통치’(민주주의)와 ‘각자에 의한 각자의 통치’(아나키즘)로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가 말한 아나키즘은 바로 자치를 뜻하는 것으로서, 정치적 기능이 모두 경제적 기능으로 환원되고, 그 결과 사회질서는 모두 질서와 교환이 되는 사회로 돌아가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그 완전한 달성은 불가능하고, 권위의 원리, 경찰제도, 압제의 수단, 관료 조직, 조세 등이 그 가장 단순한 형태로까지 축소되고, 고도의 집중주의가 연방 제도와 공동체적 기풍에 의해 전환되고 소멸되는 것을 아나키 사회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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