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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숙의 숨겨진 그림 이야기] 동성애를 대하는 태도, 프란시스 베이컨과 앤디 워홀
[박희숙의 숨겨진 그림 이야기] 동성애를 대하는 태도, 프란시스 베이컨과 앤디 워홀
  • 박희숙
  • 승인 2020.08.10 1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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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인물’--1953년, 캔버스에 유채, 152*116, 개인소장
‘두 인물’--1953년, 캔버스에 유채, 152*116, 개인소장

지금 동성애가 사회적 이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때문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핵심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금지라고 할 수 있는데 성적 취향이나 조건 때문에 동성애자들이 사회적으로 제약을 받으면  안 된다는 취지의 법이다. 

여전히 동성애는 시대와 문화를 불문하고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하지만 동성애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가장 이상적인 사랑은 성인 남자와 미소년의 사랑이었다. 여자는 종족 보존의 수단으로 여겼을 뿐이며 영원한 사랑은 미소년과의 사랑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성인 남자는 미소년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어 주는 역할을, 미소년은 성인 남자에게 여성의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동성애는 미소년이 성인으로 가는 길에 필수적으로 겪어야 되는 일이며 사회 전체가 육체와 정신의 완벽한 결합은 동성애밖에 없다고 여겼다. 

완벽한 사랑으로 여겨졌던 고대 그리스 시대에 동성애는 중세에 와서 종교적, 정치적, 도덕적 이유로 사회적으로 비탄을 받는 행위로 여겨졌다. 

사회 질서를 파괴한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던 동성애가 사회적으로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세기부터다. 성의 정체성에 관심을 가진 과학자들 때문에 동성애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오늘날에는 동성애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나라들도 많이 있다. 

화가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도 화가의 성향에 따라 다르다. 20세기 최고의 천재라고 꼽히는 피카소는 수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통해 작품을 완성했다면 동성을 사랑했던 프란시즈 베이컨은 자신의 성향을 작품 속에 녹여 내었다. 

영국이 낳은 현대 미술가 프랜시즈 베이컨은 자신을 가리켜 ‘완전한 동성애자라고 말하고 다녔을 정도로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숨기지 않았다. 

베이컨은 어린 시절부터 여성적인 취향을 드러냈다. 그의 여성 취향을 고치기 위해 아일랜드 지주였던 아버지는 마부를 시켜 정기적으로 매질을 했지만 오히려 베이컨은 마부의 채찍질에서 성적 쾌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결국 베이컨은 어머니의 속옷을 입고 있다 아버지에게 들켜 쫓겨나 런던에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런던에서 그는 여성복 가게 점원, 파출부, 건달 생활을 하면서 부유한 남자들과의 성관계를 통해 성적 쾌락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베이컨의 문란한 생활을 안 가족들은 그의 동성애 취향을 바꾸기 위해 베를린에 살고 있는 삼촌에게 보낸다. 당시 동성애 클럽이 성행하고 있던 베를린에서 베이컨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받아들였다. 

독일 동성애 클럽에서 진정한 편안함을 느꼈지만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기가 된 것은 1927년 파리에서 생활이다. 파리에서 그는 동성애 부자 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미술관에서 대가들의 그림을 보고 감명을 받아 그림에 흥미를 가진다.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 런던으로 돌아온 베이컨은 어린 시절의 유모와 함께 생활을 한다. 그가 유모와 함께 생활은 한 것은 그를 유일하게 믿어준 사람이자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유모는 베이컨이 타임지에 <신사들의 친구>라며 광고를 내자 찾아온 남자들을 먼저 선별해 소개해 주곤 했다. 베이컨이 광고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유모와의 생활비와 그림을 그릴 수는 돈이 필요해서다.   

하지만 베이컨은 화가로 활동하면서도 여전히 매춘을 한다. 새로운 동성애자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매춘은 돈은 물론 최고의 쾌락을 주었다. 섹스, 도박, 술을 탐닉하면서 베이컨은 자포자기에 빠져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 그때 공무원이었던 에릭 홀이 나타나 베이컨이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와준다. 그와 베이컨은 15년 동안 함께 살았다. 

세계 2차대전이 한창일 때 베이컨은 전쟁으로 인해 죽음이 임박했다는 생각에 향락에 빠진 생활을 멈출 줄을 몰랐으며 화가로 성공한 60대와 70대에도 여전히 동성에 클럽을 찾아다닐 정도로 문란한 성생활을 즐겼다. 

베이컨은 1960년대 동성애자에 대해 합법적으로 인정하자 오히려 반대한다. 금지된 것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동성애가 수치였던 시대에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결코 숨기지 않았던 베이컨의 성향은 예술세계를 이끌어주는 계기가 된다. 

베이컨의 성적 성향을 드러낸 작품이 <두 인물>이다.

남자들의 육체는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비틀리고 흐트러진 선 위에서 하나의 덩어리로만 보인다. 연인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순간을 맞이하지만 어두운 방 안에 갇혀 있다. 

이 작품에는 감정 상태를 포착하여 표현하려는 의도 외에는 다른 의도는 전혀 없다. 베이컨은 자신의 의도를 성행위를 하고 있는 두 남자의 이미지에 반영했다. 

베이컨은 성행위의 순간적인 쾌락과 후회를, 또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느끼도록 하기 위해 연인들의 얼굴은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베이컨은 이 작품에서 실제의 성행위를 재현함으로써 자신의 동성애를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모델은 베이컨과 그의 애인이다. 

프랜시즈 베이컨<1902~1992>은 20세기에 활동한 예술가들 가운데 인간의 비극을 선명하게 표현한 화가다. 전 생애를 담은 베이컨의 작품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이지만 그는 실제 경험에서 얻은 감정을 매우 격렬하고 비극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했다. 

동성애가 금기시된 시대에도 베이컨은 자신의 동성애 취향을 적극적으로 밝혔다면 20세기 현대 미술의 거장 앤디 워홀은 동성애가 밝혀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워홀은 어린 시절부터 인형이나 여성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해 가족들은 그가 동성애자가 될 것을 일찍부터 알았다. 여성 취향의 워홀은 그림을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동성애자 문화를 접하게 된다. 

워홀은 재즈 색소폰 연주자 래리 리버스와 동거하기 시작한다. 리버스는 결혼을 했지만 재미삼아 남자 동성애자들과 관계를 갖고 있었다. 리버스와 다르게 여자들에게 흥미가 없었던 워홀은 다른 선택권이 없어 그와 동거한다.

동거 중에도 워홀은 매력적이고 보스턴 명문가의 여자처럼 되고 싶어 사교계 인사들이 드나들던 유명 동성애 카페를 드나들었다. 하지만 워홀은 수줍은 성격이어서 남자들에게 자신의 성적 매력을 어필하지 못했다. 당시 게이 세계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철저하게 구분되었다. 워홀은 여자 역할이었다. 

리버스와 헤어진 후 워홀은 필립과 동거를 한다. 하지만 동거 중이었던 필립이 결혼하기 위해 그의 곁을 떠났을 때 심각한 공포감을 느꼈다. 한 번도 혼자 살아 본 적이 없는 그는 곧 어머니를 불러들인다.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혼자 산다는 공포는 사라졌지만 남자들과의 사랑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성적인 절망감에 빠진다. 그는 결국 집 근처에 작업실을 얻어 남자들을 불러들인다.  

워홀은 남자의 나체를 좋아했는데 특히 작업실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작업실에 오는 남자들에게 워홀은 옷을 벗어달라고 주문했고 그들의 성기를 관찰하고 사진 찍을 수 있도록 몸을 구부려 달라고 부탁을 했을 정도다. 

워홀이 게이바에 드나들면서 남자 동성애를 찾는 일상은 1960년대 그가 미술계에서 유명해지고부터는 달라진다. 

워홀은 초기에 고급 패션 잡지의 세련된 광고들을 통해 인정받고 있었지만 그는 순수 예술가로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워홀은 목표를 바꾸었다. 그는 미국 문화 속에 언어와 이미지 대중매체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워홀은 팝아트의 대가로 명성을 얻는다. 

워홀에게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 <캠벨 수프 깡통>다. 

 

‘캠벨 수프 깡통’-1962년, 서른 두 개의 캔버스에 합성물감, 각 50*40, 뉴욕 현대 미술관 소장
‘캠벨 수프 깡통’-1962년, 서른 두 개의 캔버스에 합성물감, 각 50*40, 뉴욕 현대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깡통 같은 미국의 가치에 대한 워홀의 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같은 크기, 같은 이미지의 캠벨사의 제품을 워홀은 제조 순서를 대로 완벽하게 진열하고 있는데 그는 작품 하나하나 독창성을 가지고 있는 미술의 개념을 파괴했다. 

<캠벨 수프 깡통>은 보편적으로 인식되는 미국적 상징을 정의 내리는 시도다. 미국 사회의 일용품을 차용해 이를 상업 미술품으로 이미지를 바꾸는 방식이 곧 앤드 워홀의 예술세계를 대변하게 된다. 

앤드 워홀은 자신의 생애 대부분은 캠벨 수프로 점심을 대신했다고 밝혔다. 또한 미국에서는 부르주아나 서민이나 누구나 캠벨수프를 먹는다. 따라서 캠벨 수프는 미국 대중 소비문화를 대표하는 상품이다. 

이 작품에서 같은 이미지인 것 같지만 종류가 다르다. 그래서 워홀은 캠버스를 하나하나 분리했다.  

하지만 워홀은 명성을 얻고 나서부터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결코 자신의 동성애 취향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동성애 취향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는 걷는 것 말하는 것 제스처를 통해 게이라는 것을 드러냈지만 직업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자신의 기질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워홀은 여성적인 취향과 여성 역할 때문에 섹시한 여자들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으며 공식적인 작품 외에 개인 소장용 작품에서만 자신의 성적 취향을 드러냈다. 

앤디 워홀<1931~1987>은 말년에 성격이 까다로워져 누가 자신을 만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가 ‘섹스는 환상이다. 가장 흥분되는 것은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밝혔듯이 말년에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프란시스 베이컨과 앤디워홀,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 우리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지만 독특한 취향이 예술세계를 이끌어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예술은 예술이기 때문이다. 

박희숙 화가, 전 강릉대 교수.
박희숙 화가, 전 강릉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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