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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꽃피는 봄날의 명상-넘쳐나는 말들의 홍수를 보라
[문화비평]꽃피는 봄날의 명상-넘쳐나는 말들의 홍수를 보라
  • 배병삼 성심외대
  • 승인 2001.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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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17 09:41:16

배병삼 / 성심외대·정치학

사월이다. 지금 남도의 山野는 온통 꽃들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찬바람에도 굳건하던 동백꽃은 몸을 던져 땅바닥을 핏빛으로 물들였고, 화사하던 목련은 목을 외로 비틀며 한잎 한잎 낙화하고 있다. 그 사이 비탈진 둔덕에는 샛노란 개나리가 줄지어 늘어섰고, 그 틈새에 진달래는 붉은 속살을 드러내었다. 드디어 봄비에 벚나무들이 입술을 벌렸으니, 출근길 아침의 街路는 파스텔풍 은회색으로 출렁거린다.

봄꽃들이 이토록 아름다운 까닭은 ‘花無十日紅’이라, 열흘을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 꽃들이 머지않아 질 줄을 알기에, 기껍고 또 안타깝다. 영랑이 노래했듯, 모란이 지고 나면 또 한해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한정’, ‘끝’, 혹은 ‘스러짐’이 목울음처럼 꽃 속에 잠겨있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꽃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꽃술 속에 죽음이 담겨있어야 하는 줄을 이제사 알겠다.

그러나 꽃이라고 하여 다 꽃일 수는 없는 것. ‘한정’을 넘어서면 꽃은 이미 꽃이 아니라 그냥 한 사물로 퇴각하고 만다. 한겨울, 로터리나 길가에 ‘설치’되었다가 채 시들기도 전에 철거당하는 꽃들이 꽃이기보다 차라리 거리의 풍경에 불과하였던 것처럼. 그렇다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긴 하겠지만, 그러나 “이름을 부르기 전에” 꽃으로 자처하거나 그저 활짝 피어있기만 한다면, 그건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김춘수, ‘꽃’ 부분) 않는 것이다. 넘치지 말기, 제 한정에 머물기, 이것이 꽃이 꽃일 수 있는 이유다.

말이 ‘말’일 수 있는 까닭

허나, 어디 꽃만 그러할까. 차라리 ‘한정을 넘지 않음’(止)은 이 세상 이치의 궁극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大學’의 들머리에서, 세상의 가장 큰 공부길이란 “지극한 선에 그치는 것”(止於至善)이라고 하였으니, ‘그침’의 위대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말〔言語〕이 말일 수 있는 까닭도 말이 제 뜻에 그칠 줄 알기 때문이다. 말이 뜻을 넘어 버리면 ‘소리’가 되고(그래서 우리는 술에 취해 하는 말을 대개 ‘헛소리’로 취급한다), 또 말이 오그라들면 ‘침묵’이 된다(면벽한 스님에게는 말이 장애다). 이렇게 말이란, 침묵과 소리의 한 가운데에서 저가 끌어안은 뜻(의미)에 머무를 때에야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사 가운데 큰일도 ‘말이 그치는 자리를 아는 것’을 넘지 않는다. 그러니 말을 할 땐 더듬거리지 않을 수 없다. ‘말더듬기’〔訥〕를 지혜로 삼았던 이는 고려의 ‘知訥’이었고, 말을 ‘칼날처럼 조심하기’〔〕를 권한 사람은 공자였으니, 말을 삼감에는 儒佛이 따로 없음을 알겠다.
이렇게 보면, 요즘 들어 대통령의 말이 힘을 잃어 가는 것도 까닭이 없지 않다. 그건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동안 대통령과 정부의 말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본시 말이 넘치면 실수가 잦기 마련이다. 그리고 말이 꼬이면 엉키게 되고, 말이 엉키면 어디서 ‘그쳐야’ 할 줄을 모르는 법이다. 민주, 개혁, 통일, 진보, 새천년 따위의 좋은 말들은 먼저 소유하려고 숨이 가빴고, 반면 교육문제, 의료문제 같은 나쁜 결과는 아랫사람과 남의 탓으로 돌리기에 급급하였다. 그러나 이즈음 좋은 말들은 ‘소리’가 되어 증발해버렸고, 나쁜 결과들은 ‘침묵’이 되어 국민들 가슴에 돌처럼 가라앉았다.

말의 확장, 말들의 복수

헌데 연초에 국회의원들을 ‘임대하는’ 와중에 대통령이 하는 말씀을 듣고서야, 그게 남 탓이 아니라 자업자득인줄을 알았다. 대통령은 그걸 두고 ‘넓은 의미의 正道’라고 하였으니, 바로 그 자리에서 正道라는 말은 죽어버렸던 것이다. 정도가 죽으면 정치는 따라서 죽게 되어있다. 政者正也라, 正道가 곧 政道인 것이니, ‘길’을 그렇게 넓게 펼쳐버리면 길 아닌 것이 없게 되고(大道無門?), 이에 정치는 그 넓기만 한 길에서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제 길을 잃고 만다. 그 와중에 국민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디가 발 디딜 곳인지 알지 못하고, 그 넓은 길의 전후좌우로 횡행하는 정치에게 이리 채이고 저리 채여 끝내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치에서 ‘그침’(止)이란 ‘새 말을 지어내는 것’(作名)일 수 없고, ‘있는 말을 벼리는 것’(正名)일 따름이다(이 세상에 새로운 것이란 없다). 말의 날을 날카롭게 벼려, 말 한 마디로 죽음과 삶을 선연히 가를 수 있을 때, 그제서야 정치는 제 자리를 찾는 것이다. 花無十日紅이라, 꽃이 한정이 있을 때에야 아름답듯이, 말도 칼처럼 한정될 때에야 힘을 얻는다.

 
그런데도 자기 말은 넓게 확장하려 들면서 남의 말은 좁게 구속하기를 꾀한다면, 넓히려는 제 말은 기껏 길거리의 겨울꽃처럼 풍경으로 퇴각하고 말 것이요, 좁힘을 당하는 자들의 말은 도리어 단련되어 칼날이 되어 뒤통수를 칠 터이다. 세상사, 이치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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