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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윤리지침서...일상과 윤리의 문제 성찰
과학자 윤리지침서...일상과 윤리의 문제 성찰
  • 박소연 미국통신원
  • 승인 2004.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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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출판동향_『실험실에서 시작하는 연구 윤리』(레스닉 외 지음, 옥스퍼드대출판부 刊, 2003)

지난달 7일 발생한 인디애나 한 대학생의 자살 사건이 연구 윤리 논란을 가져온 일이 있다. 분명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자살한 학생이 당시 엘리 릴리라는 제약회사의 항 우울증 치료용 약품을 테스트 받는 실험대상으로 참여 중이었으며, 그녀가 목을 맨 곳은 바로, 실험을 위해 그녀가 머물던 인디애나 의과 대학에 위치한 이 회사의 연구실이었다. 따라서 초반에는 실험당시 그녀에게 테스트된 약물과 실험 후기에 사용된 위약 등이 미친 영향이 자살의 직간접적 원인으로 의심됐다. 이후 이 학생이 실험에 참여하는 대가로 하루 1백50불과 식사를 제공받기로 돼 있었고, 그녀의 실험참여는 사실상 학자금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 등이 추가로 알려지게 됐다.

심리학 등의 사회과학 연구나, 각종 생명 의료 연구와 관련된 실험의 대상으로서 살아있는 인간이 필수 불가결하게 수반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실험 대상으로 자원하는 인간 주체들은 과학 기술에 공헌하는 순수한 자발성만으로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참여자의 순수성을 왜곡시킬 수 있는 과도한 금전적 보상은 오히려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연구 윤리의 정설이다. 또한, 특히 정신과적 약물과 관련한 위약의 사용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이 의료 윤리에서 종종 지적되곤 한다. 따라서 설령 릴리 측의 실험이 이 학생의 자살 사건에 끼친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입증할 수는 없다 해도, 윤리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이번 사건이 껄끄러운 여운을 남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생명 의료 연구와 관련되는 윤리의 문제는 다시 한 번 곱씹어야 할 문제로 각인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가령, 인간이 수반되는 실험은 어떤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가. 어떤 대상을 포함시킬 것인가. 실험 대상으로 자원하는 이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하는 물음들은 생명 의료 연구가 기본적으로 전제해야 하는 윤리적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물음이 중요한 분야가 단지 생명의료 분야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 20여 년 간, 과학의 전 분야에서 표절이나 조작을 비롯, 각종 형태의 ‘과학적 사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해온 상황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현재 데이터를 정렬하는 방식은 제시된 결과에 맞추기 위한 조작이 아닌가. 공동저자의 기여도를 어떻게 밝힐 것인가. 동료 과학자 평가의 공정성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등의 물음들에 주의를 기울여보면, 사실 연구에 있어서의 각종 윤리문제란 연구자들의 지극히 일상적 선택의 문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가 ‘윤리’를 발화하는 방식이 상당히 형이상학적에 뉘앙스에 머물거나 하드코어 철학의 차원에만 가둘 때,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를 전제하는 연구라는 이상은 공허하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나 윤리학자의 사투리를 넘어서는, 즉 일종의 현장 과학자용 레퍼런스 북과 전문가 윤리 교육이 절실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미국의 교과서 출판 시장에서, 철학 전공자가 아닌 학생들을 겨냥한 연구 윤리 관련 서적들의 출판이 점증하는 현상은, 대학들이 미래의 전문가 집단을 위한 윤리교육을 강화하는 추세와 맞물린다고 여겨진다.

'책임있는 연구 수행 Responsible Conduct of Research'(옥스퍼드출판사 刊, 2003)는 딱 그런 종류의 요구에 부합한다. 철학·윤리학자인 레즈닉과, 현재는 전문가 윤리를 강의하고 있으나 과학자의 배경을 지닌 새무가 공동 집필한 이 책의 장점은 참신함에 있다기보다는, 과학자의, 어쩌면 사소할 수도 있는 일상적 활동에 윤리적 문제들을 일관되고 깊숙하게 연관시키는 점에 있다. 그것도 일상언어로. 가령 자료의 수집과 분석, 운영, 실험의 디자인 등등에서 “무책임”하지 않고 윤리 강령들에 위배되지 않는 연구의 수행은 어떻게 가능한가, 저자 표기의 문제와 공동연구의 책임 및 보상 배분 등의 문제는 어떤 윤리적인 물음들과 함께 하고 있는 지, 이해의 충돌 상황에서, 산학 공동 연구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들과 해결 방안은 무엇인지 하는 주제들이, 다양한 가상·실제의 사례와 함께 제공돼 있다. 최근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유전학, 동물 연구, 인간이 실험대상이 될 경우 등에서의 윤리에 대해서도 과학연구의 현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생생한 사례들과 함께 고찰하고 있다.

이 일상적이어서 사소한 윤리적 잣대들을 들이밀 때, 연구 프로젝트의 주체에 따라 내용과 무관하게 춤추는 연구 ‘주제’들이라든가, 공동연구자로서의 공헌을 인정받지 못하는 연구자들, 통계적 조작의 문제 등 연구 풍토 속에 관행처럼 자리잡아 있는 행위들도 심각한 반성의 대상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과학연구가 윤리적이고 책임있는 종류의 것이어야 하는 이유가, 과학의 진보에 대한 믿음에 바탕하는 듯한 저자들의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저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역사상 수많은 과학 거인들의 ‘과학적 사기와 윤리적 위법행위들’을 그들의 과학적 성취라는 결과를 이유로 쉽사리 정당화시킬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소연 미국통신원 / 버지니아텍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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